이반 일리치의 죽음 — 가장 평범해서 가장 섬뜩한 삶

레프 톨스토이,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인생의 민낯

by 신세연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문학사에서 가장 무서운 문장 중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그의 지난 삶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히는 2장의 첫 문장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했으며, 따라서 가장 끔찍했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 왜 끔찍할까요. 우리는 보통 그런 삶을 안정적이고 성공적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이반 일리치는 판사였고 적당한 부를 쌓았으며 남들이 보기엔 흠잡을 데 없는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는 평생 품위 있게 살기 위해 애썼습니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남들 눈에 매끄럽게 보이는 삶을 정답처럼 믿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그를 덮치는 순간 그 정답은 아무 의미도 남기지 않습니다.


원인 모를 병이 그의 몸을 잠식해 가는 동안 가족들은 그의 고통보다 연금과 승진을 계산합니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 이후 생길 자리를 떠올립니다. 그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올린 삶이 사실은 하나의 연극이었다는 사실을요.


이 소설이 무서운 이유는 이반 일리치가 악인이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모범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다만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묻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는 정말 이렇게 살고 싶은가.


그는 불편한 진실 대신 무난한 가식을 택했고 깊은 대화 대신 안전한 관계를 선택했습니다. 행복보다는 인정받는 모습을 좇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죽음은 삶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낼 뿐이라고요.


이 책을 읽으며 저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이반 일리치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남들이 무엇을 부러워하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직함과 숫자와 이미지로 나를 설명하며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가 찾아오곤 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비어 있을까. 그건 아마 내 삶의 중심에 내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직전 사흘 동안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자기 삶 전체를 부정해야 하는 순간의 고통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시작된 삶이 필요했다는 것을요. 그 깨달음의 순간 그는 처음으로 평온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살아본 셈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을 통해 삶을 묻는 소설입니다. 만약 내일 죽는다면 지금 붙잡고 있는 것들이 여전히 중요할지 조용히 되묻습니다. 체면과 평가와 비교와 겉치레를 위해 오늘을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입니다. 다만 기한을 모를 뿐이죠.


이반 일리치의 비극은 죽음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야 삶을 이해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끝까지 읽고 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의 질문만 남습니다.


지금의 나는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삶을 우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에서 가짜를 덜어냅니다. 남들의 기준은 흐려지고 진짜 중요한 것들만 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 의미 없는 말을 덜어낸 대화. 나를 나답게 만드는 시간들.


어쩌면 잘 산다는 건 대단한 성취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문을 두드릴 때 그래도 나 나답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통해 조용히 말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당신은 아직 살아 있고 그래서 아직 선택할 수 있다고.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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