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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Sep 17. 2017

덕수궁, 고종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 빛•소리•풍경'을 다녀와서


 벌써 가을의 선선함이 서울 시내를 감싸는 듯 하다. 나는 날이 선선해지면 친구들과 함께 덕수궁을 찾곤 한다. 첫 방문은 의외로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계기는 싱거웠다. 친구들과 시청 아이스링크장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그 앞에 고궁을 발견하곤, “덕수궁이 여기 있었어?”하며 이끌리듯 들어갔던 것이다.
 그 때부터 늘 이곳을 함께 찾던 친구들마저 우리가 애늙은이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계속 이곳에 오게 되는 것이냐며 농담을 하곤 했지만, 이곳은 역시 계속 찾게 되는 끌림 같은 것이 있다. 이러한 끌림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고궁을 거니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러한 끌림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궁궐치고는 아담한 크기라던가, 그 아담한 궁궐이 머금은 방대한 역사적 의의같은 것들을 들어 그 설명을 완성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덕수궁’하면 떠오르는 인물과 아픈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이곳은 누군가의 ‘집’ 이었다.>


 ‘집’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공간, 지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내 몸을 뉘일 공간,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나를 기다리는 공간으로 다가올 것이다. 덕수궁은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곳, 다시 말해 그의 집이다. 그렇다면 덕수궁이 고종의 집이었을 때, 과연 이곳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에겐 이리도 일상적인 집이라는 공간의 의미가 과연 고종에게도 적용됐을까?
 조선 말기, 조선에 대한 서구 열강들의 이권 다툼은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고종은 러시아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분명히 밝혀 정국을 주도해 나가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이러한 의지와 시도는 일본에 의해 짓밟혔고, 결국 일본의 강압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며 승하할 때까지 덕수궁에 억류하였다.

 러시아에서 돌아 온 직후의 고종황제에게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담긴 공간이었다. 그러나 왕위에서 물러난 후 덕수궁은 독살의 위협때문에 통조림으로 식사를 대신하는 공간,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시해한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고종이 덕수궁에서 지내는 동안 느꼈을 이러한 감정들을 짐작케 하고, 조선 후기 우리나라의 현실을 현대미술로 해석하고 표현하여 우리에게 전달한다.



<문화유산과 역사를 현대미술로 재해석하다>​​​​


덕수궁 야외프로젝트: 빛•소리•풍경
2017년 9월 1(금) ~ 2017년 11월 26일(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무료)


 역사와 현대가 만나 이색적인 공간을 탄생시켰다. 이번 전시는 미술과 음악 분야에서 자신만의 작업방식을 구축하고 있는 9명의 예술가들이 한국근대사 및 대한제국기에 대한 자료수집과 조사를 진행하고, 수개월간 덕수궁을 드나들며 이곳에 스며있는 역사적 배경과 공간적 특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결과의 산물이다. 덕수궁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현대미술을 통한 조형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전시순서는 관람객의 입장동선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는데 중화전 동행각, 석조전, 석어당, 덕홍전, 함녕전 순이다.



<현대미술을 통해 역사를 보고 듣다>


석조전 서쪽계단

[김진희, 딥다운- 부용, 2017]

 김진희는 희로애락의 시간이 축적된 공간인 덕수궁의 장소성에 주목하며 전자기기의 해체와 재조립이라는 고유의 작업방식을 통해 이 특수한 공간에 존재했던 여러 흔적을 표현해 냈다. 작품의 외관은 덕수궁이 유구한 시간속에서 마주쳤을 여러 사건들을 재조합하여 나타내었으며, 공기를 떠도는 라디오 주파수를 자동적으로 잡아내거나 그 옛날에도 덕수궁을 적셨을 빗소리나 바람소리 그리고 오래된 나뭇잎의 움직이는 소리들이 나오고 있다.
 고종이 생활했을 공간을 밟고 전시물을 관람하는 관객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동일성을 동시에 느낌으로서 덕수궁이 지나온 세월을 피부로 직감 할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 전시물은 계단위에 제작되어 멀리서, 가까이서, 밑에서, 위에서 등 다양한 각도에서 작품을 대면하도록 의도되었다. 사실 처음 멀리서 전시물을 봤을 때 전시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거대한 거미줄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뒤, 이 전시물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시각적인 요소에 바람소리, 빗소리 등의 청각적 요소까지 더해져 이 공간의 현재 뿐만아니라 과거까지 온 몸의 감각을 이용하여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덕홍전

[강애란, 대한제국의 빛나는 날들, 2017]

 덕홍전 안은 빛을 발산하는 100여권의 디지털북과 실제 서책, 오래된 가구, 영상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애란 작가는 고종황제가 자신의 서재에 어떤 책이나 물건을 두었을까 하는 질문에서부터 이번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조서왕조실록, 고종황제가 즐겨 읽던 서적 및 외교문서 그리고 대한제국의 황실문화애 대한 자료 등이 배치된 가상의 황실 서고를 재현해 내었다.
 이곳은 당신이 이번 전시를 밤에 관람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형형색색 빛을 발산하는 책들의 아름다움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욱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황실 서고를 현대미술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을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밤에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함녕전

[이진준, 어디에나 있는 하지만 어디에도 없는- 불면증&불꽃놀이, 2017]

 작품이 설치된 함녕전은 고종황제가 승하하셨던 공간이다. 작가는 이 공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을 영상과 소리로 풀어냈다.

 이 공간은 크게 두가지 영상이 채우고 있다. 먼저 블라인드가 벽에 부딪히는 영상은 고종황제가 겪었던 불면증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불꽃놀이 영상과 과거 핵 실험 영상들을 재구성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이 영상들은 곳곳에서 들리는 낯선 소리들과 조화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데, 이것이 바로 작가의 중심 의도이다.

  폐위 후의 고종황제는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황제라는 화려한 수식어와는 상반되게 나약하고 무력했다. 작가는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해 억류되어 생을 마감한 이 장소에서 가졌을 감정을 표현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한 세계적 갈등을 시사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를 빼앗긴 황제의 마음은 어땠을까. 황제라는 화려한 이름 뒤로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의 무게는 어땠을까.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고종의 눈과 귀로 보고 듣던 덕수궁의 빛, 소리, 풍경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시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고궁안에서 진행되는 전시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덕수궁의 밤은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단청과 기와에 붉은 조명이 어우러져 낮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관람시간은 9시까지이니 퇴근 후, 혹은 하교 후에 시간을 내어 방문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빼앗긴 들에 봄이온지 72주년이 되었다. 봄이 오기 전의 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다면 이 전시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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