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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프롤로그

생존전략 ep.13

*현주와 민준


현주가 입원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회복이 가능할까 싶었던 몸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심각한 문제처럼 느껴졌던 것들이 점점 일상의 문제에게 다시 자리를 내주었다.

현주의 부모님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병원을 방문했다. 전화야 자주 오지만 두 분은 바쁜 삶에 치여 방문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이전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주는 자칫하면 끝없는 외로움에서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그것만큼 최악의 경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민준이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부모님이 병실을 떠난 직후였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닫힌 병실의 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거의 두 달이 다 돼가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현주는 의사 선생님이겠거니,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문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멀끔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현주도 얼떨결에 인사를 건넸다. 

“몸은 좀 어때요? 많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남자가 손에 들린 과일 바구니를 옆에 두며 말했다.

처음 보는 남자다. 처음 보는 남자가 말을 건네고 본인을 위해 과일 바구니를 사 들고 왔다. 


타인과의 교류는 필연적으로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그녀의 삶은 예외 없이 그래 왔기 때문에 그것은 말 그대로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과일 바구니는 다른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

현주의 외로움이, 늘 그녀의 몸속에 내재되어 있던 깊은 외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와 그녀의 눈을 가렸다. 이번은 아니겠지, 이번은 아닐 거야 하면서 늘 같은 결과를 맞이했음에도 두터운 안개 때문에 결국 다시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주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운명은 늘 갑자기 시작되는 것 아니겠는가. 

“괜..찮아요.” 

현주는 약간의 통증을 느끼면서도 올라오는 미소를 어찌하지 못하며 말했다. 이미 양 볼은 화끈거렸고 오랜만에 벅찬 행복을 느꼈다. 왜냐면 지금 이것은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깊은 외로움과 약간의 그럴싸한 상황이 안개를 만들어 냈으니, 현주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보호자분들은 안 계시나요?”

“네..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내일도 올까요?” 

현석의 의도는 보호자분이, 국가대표 계륵의 사장인 김재위 씨가 내일도 오느냐는 뜻이었다.

“네? 네, 그럼 저야..” 현주는 운명의 남자가 훅 들어오는 바람에 어찌할 바를 몰라 나오던 말까지 멈췄지만, 이어 나가야 한다. 무슨 말이라도 뱉어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좋아요. 내일도 오세요.” 현주는 겨우 싱긋 웃으며 말했다. 


흠... 민준은 여자의 화법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별 신경 쓰지 않고 내일을 기약하기로 했다.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 다음다음날도 민준은 병실을 방문했다. 사실 이틀째 방문한 날에 냉기가 도는 병실을 보며 이곳에서 가능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국가대표 계륵 앞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냥 그녀에게 연락처를 알아낸 뒤 연락을 취하는 쪽이 훨씬 더 빠를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민준은 그 직감을 무시한 것이다. 알면서도 본인조차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생각 속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무엇이 그의 발길을 병실로 이끌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병실을 향했고, 진짜 본인의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녀 옆에 있었다. 그의 진심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지만 민준 스스로도 그것을 사업을 위한 일이라며 철저히 자신을 속였다. 그렇게 민준은 현주 씨의 아버님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짧은 시간이나마 그녀와 함께했다. 그간의 시간은 사업적인 면에서 보자면 지극히 멍청하고 어리석은 짓이었다. 일과 감정을 분리할 줄 아는 그의 냉철함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도 현주의 병실에 방문하는 사람은 오직 민준뿐이었다. 마치 그녀는 혼자 고립되어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웠다. 과거의 본인처럼 가족들에게조차 버려진 채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세상은 늘 약한 사람에게 더 큰 시련을 주지 않던가. 그것이 ‘강해지기 위한 발판’이라는 핑계와 함께 말이다.

일주일이 지난 후로 민준은 마치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매일 방문하고 관찰했다. 어느새 방문의 목적이 사업과 전혀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른 이유를 찾아낸 것이다. 

어쩌면 시간대가 맞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에 주변 사물의 이동도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역시 누군가 들른 흔적은 없었다. 간호사와 의사를 제외한다면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민준은 그 버려졌을 때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방문 목적은 ‘동질감’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민준 또한 인간에 불과하고, 인간이 고려해야 할 것은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판단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이었다.

“오늘도 없네요.” 민준이 병실에 들어서며 말했다.

“오셨어요?” 현주는 불편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누워 계세요.” 민준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간이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가족분 들은 영영 안 오나 봐요.”

“네 뭐.. 지금은 크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니까요.”

“도움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어쩌면 이제 볼 수 있는 날이 많이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죠.”

“..헤헤.”

“가족이란 게 참 뭔가 싶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잔소리하고 너를 위한다 위한다 하는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는 뒤통수치기 바쁘지 않습니까. 뒤통수까지는 아니라도 외면은 쉽게 해버리고 말죠.”

“헤헤..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그쵸. 그래도 가족이죠. 어쩌면 가족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준은 잠시 뜸 들이다 말을 이었다. “저는 늘 버림받았거든요. 아빠가 떠난 후로 새엄마한테, 조금 더 지나서는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친척들한테 까지요. 가족이라는 게 얼마나 쉽고 가벼운 집단인지, 삶이 조금만 힘들어진다 싶으면 아주 고민 없이 첫 번째로 내다 버립니다. 가족도 결국 절대적인 집단이 아닌 거죠. 조건부 집단입니다. 몇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진정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거라구요.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고 삐뚤어진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그게 현실입니다.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걸 찾아서는 안 돼요. 여기는 그런 게 없거든요.”

“그래도..”

“그래도,라는 건 없습니다. 가족이라는 집단이 그래요. 서로 간의 이익이 없으면 금방 멸시당하고 치부로 여겨지고 말죠. 그러니까 본인이 뭘 이루고자 하는 것도 없이 목적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아들딸이 되는가, 어떻게 자랑거리 구성원이 될까 하는 목적이 생겨나고 마는 겁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구하면 뭐가 해결됩니까. 여전히 어느 정도 불행하고 어느 정도 행복할 뿐입니다. 단지 가족들의 입장이 바뀔 뿐이죠. 우리 아들이 어디 갔다, 하면서 동네방네 소문내기 좋잖아요. 입지도 올라가는 거 같고. 근데 그게 또 오래가지는 않거든요. 다음은 차를 샀니, 집을 샀니, 투자에 성공했니, 뭐 하니 하면서 꾸준히 자랑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가족은 그런 거예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건 그런 겁니다. 가족이 떳떳할 수 있게 끊임없이 자랑거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골칫덩이 취급이나 받을 뿐이죠. 여차하면 관심도 주지 않고 버림받을 수도 있구요.”

“헤헤..”

그것은 현주의 삶이다. 원치 않는 외모를 타고나는 바람에, 시작부터 자랑거리 하나를 잃은 것이다. 원치 않는 식성을 타고나는 바람에 너무 많이 먹었고, 운동을 싫어하는 바람에 살이 불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상한 버릇이 생긴 바람에 인중이 헐어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소심하고 당당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에 대응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해결책을 찾다 보니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고, 해결책에 집중했음에도 해결책을 찾지 못했으니 다른 세상을 선택했다. 다른 세상에 빠진다는 것은 현실에서 폭망의 지름길이었지만 그녀에게 남은 길은 그곳뿐이었다. 그렇게 현주는 이미 불행한 상태에서 차츰차츰 더 불행해져 갔다. 그녀에게 남은 자랑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비대한 비난거리들 때문에 그녀의 유일한 자랑인 경제적 여유마저 없는 셈 쳐진 것이다. 처음부터 꼬여버린 세상에서 아무런 탈출구도 제공받지 못하고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의 역할은 골칫덩이다. 그게 아니면 위안의 대상이다. 

현주는 흐르는 눈물이 베개에 닿고 스며들어도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봐요. 들어 줄게요. 제 직업이 심리 상담사라,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비용이 들긴 하는데.. 현주 씨는 예외로 치겠습니다. 재능 기부라 치죠 뭐.”

“고맙..습니다. 헤헤.” 현주는 병실에서 생활한 지 한 달 반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빨갛게 충혈된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있지만 그녀의 입만큼은 미소 짓고 있었다. “저.. 음.. 막상 말하려니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민준은 침묵을 지켰다. 지금 이 순간 민준의 머리에서 항상 두드려지고 있는 계산기가 작동을 멈췄기 때문에, 그녀의 대답을 보챌 필요도 없고 쓸데없는 조언을 할 필요도 없다. 오로지 그녀의 입에서 이야기가 스스로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들어주고 공감하고 함께 느끼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들어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고 말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태도인 것이다.

“사실.. 다 모르겠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헤헤.. 그냥 제가 이런 사람인 거죠 뭐.”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현주는 이제 끅끅- 거리며 눈물을 더 쏟아냈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처음부터 꼬여버린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녀의 삶에 해결책은 없었다. 진정한 해결책은 이미 그녀가 찾아냈듯이, 게임 속 세상으로의 도피뿐인 것이다. 세상에는 복지, 배려, 보호 등의 약자를 위한 말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닿지 않는 곳도 있는 법이다. 심지어 현주의 경우는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불행을 타고난 덕에 복지도 배려도 보호도 받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수치로 나타나는 세상에서 어릴 적 그녀의 용돈과 몸무게, 현재의 통장 잔고는 오히려 복지를 베풀어야 할 쪽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현주의 경우는 아주 밑바닥의 약자에 속했던 것이고 그녀가 사회에서 맡은 역할은 타인의 바닥을 깔아주고 비교 대상이 되어주어 약간의 행복감과 안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피뿐이었던 것이다.

“저는 제가 잘하면 다 잘 될 거라 생각했는데.. 헤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세상에서는.. 정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잘하는 게 돼버리죠. 이용하고 부려먹고 위선적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여기서는. 현주 씨가 잘못한 게 있다면 세상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거밖에 없습니다.”

“그럼 민준 씨가 알려줘요. 저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민준 씨가 옆에서 알려주면 안 돼요?”

“..”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민준 씨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인데.. 죄송해요.”

“그래도 자주 올게요.”

“자주.. 그러니까 계속 온다는 말씀이죠?”

“그럼요. 계속 오겠습니다. 저 아니면 올 사람도 없잖아요.” 민준이 장난스레 말했다. 

“그럼.. 제 간병인으로 있어줄래요? 돈이라면 민준 씨가 원하는 만큼 줄 수도 있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얼마 남지도 않은 사람이라..”

민준은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감정의 힘으로 돌아가던 두뇌에 이성이 끼어들기 시작했고, 이성의 힘이 끼어든 그의 머리는 훨씬 더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의 말속에 들어있는 힌트 몇 가지로 상황을 예측하고 해석하고 가능성을 따졌다. 이성을 배제한 곳에서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간병인? 그거 귀찮은 직업 아닌가? 아니지. 어쩌면 다른 어떤 일보다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을지도 모르지. 현주 씨는 착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은 대부분을 이해하는 와중에 본인의 피해는 감수하려 드는 버릇이 있으니까. 어쩌면 몇 마디 옆에서 떠들어주면서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현주 씨와 이런 계산적인 관계를 맺는 게 맞는 걸까. 현주 씨의 말대로 그녀는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녀가 떠나면 내 간병인 생활도 끝나고 말 텐데. 어쩌면 감정적 관계가 더 이득일 수도 있다. 남은 시간을 투자 기간으로 잡는다 치고 수익이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만 되면 안정적인 수입을 오랫동안 유지할 방법이 있지 않은가. 엄마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뜻대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주 씨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김재위 씨에게 쌓이는 내 신뢰도도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원하던 목표에도 어느 정도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김재위 씨가 현주 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골칫덩이라 할지라도 죽음은 골칫덩이마저 가족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던가. 

현주 씨와는 감정적으로 엮이는 것이 훨씬 더 수지가 맞다. 지금 당장의 수익이 아니라 미래의 수익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민준은 판단이 섰다.

“간병인은 됐습니다.” 민준은 잠시 틈을 두고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보호자라고 해두죠.”

“그럼..”

“현주 씨 옆에 있을게요. 현주 씨가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 옆에 있겠습니다. 대신 현주 씨도 한 가지만 약속해 줘요.”

현주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눈썹을 추켜올렸다.

“나중에라도, 건강을 되찾는다 하더라도 저희 관계는 이어지는 겁니다. 현주 씨랑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요.”


그러나 민준의 진심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사실 마음을 숨기기 위해 이성적 판단하에 움직인다고 본인 스스로에게도 거짓말 쳤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서툰 몇몇 사람들이 버림받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자주 사용하곤 하는, 쓸데없는 핑계 또는 그럴 싸한 방어막과 별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둘의 관계는 감성으로 시작해 이성으로, 이성에서 다시 감성으로, 결국에는 많은 관계가 그러하듯이 감성과 이성이 적절히 융화되어 이어졌다. 둘의 목적이 어떻든 간에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생존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해야 할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이기적이라거나 계산적이라는 말은 집어치워라. 그딴 것들은 모두 각자의 머릿속에서 판단한 것이 아니던가. 타인의 삶에 대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그 외의 모든 말은 본인의 경험으로 꾸려진 생각으로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무언가를 추측하는, 편협하고 저급한 판단일 뿐인 것이다. 모든 것은 단지 각자의 생존전략일 뿐인 것이다.




*지훈

내가 살아왔던 날들. 믿어왔던 진실들. 최고의 가치라 여겨왔던 대상들. 정의라 생각했던 것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진리라 믿어왔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나에게만 적용 가능한 것들이었고, 내가 믿어왔던 세상은 너무도 작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멍청한 인간들, 자기 세상에 갇혀 사는 한심한 인간들, 그 외의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별종들. 그들에게는 내가 그런 인간이었던 것이다. 별반 다를 거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여태 믿어왔던 모든 것들은 내 오만이 만들어낸 확신이었다. 

“얼마나 많은 걸 고려했다고 생각해?”

고려한 것은 내 기준에 맞춰진 편협한 생각과 판단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는 작은 두개골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고,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가 타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고작 눈으로 보이는 껍데기, 그마저도 내 세상 속에서 각색된 싸구려 삼류 소설뿐이었다.

지훈은 병원을 나섰다. 말없이 조용히 나섰다. 그동안 얼마나 오만했던가. 

다시 글을 써야 한다. 작가로서 할 일을 해야 한다. 

오만, 그 뒤에는 항상 시련이 따랐고 시련 뒤에는 늘 고뇌가 따랐고 그 뒤에는 성장이 따르기 마련이니, 지훈에게 있어 세상의 소멸은 곧 더 나은 세상의 시작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존의 세상이 틀렸다면 얼른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면 그만이니. 

더 크게 무너질수록 더 크게 성장할 뿐이다. 지훈은 그렇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고, 그것이 지훈의 삶의 방식이며 생존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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