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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사실 중요한 건 사실이 아니다.

생존전략 ep.12

@현재


“나 왔어.” 

민준이 방에 들어서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뻔뻔함과 용기가 필요했다. 지훈의 말이 진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현주의 머리는 이미 정보를 수집했고 어느 정도는 상황에 맞춰보며 자기 식대로 해석하게 될 것이니.

“얘기는 잘했어?” 

현주가 무거운 입을 뗐다. 여전히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과 코에서는 온몸의 수분을 다 분출하기라도 할 작정인지 액체가 쉴 틈 없이 흘러댔다.

“변명 같은 거 안 해. 내 성격 알잖아. 거짓말도 안 해.”

“거짓말도 좀 하고 그래. 변명도 마찬가지고.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좋게 생각해 볼 거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한텐 거짓말하는 거 아니라며. 좋든 안 좋든 그냥 좋게 생각해.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말할게. 안 좋아도 좋게 생각해. 그럼 좋은 게 되는 거야.”

“아니, 말하지 마.”

“처음 여기 들어섰을 땐..”

“말하지 마!!” 현주는 소리쳤다. “제발.. 제발 민준 씨. 나 모르고 살래 그냥. 제발 말하지 마. 어?”

“지금 말 안 하면 다음은 없어. 그럼 우리도 그저 그런 관계가 되는 거야. 침묵해야만 평화로울 수 있는 관계잖아 그거. 침묵을 강요하진 말자. 서로 눈치 보면서 찝찝하게 지낼 바에야 그냥 다투고 싸워. 솔직하게 털어놓고 싸울 건 싸우고 넘어가자고. 차라리 그게 더 건강에 좋아.”

“무서워. 당신이 진심이 아니었을까 봐 무서워. 그런 건 차라리 모르는 게 좋은 거잖아.”

“그건 듣고 나서 생각해. 어차피 이젠.. 그냥 불행하거나 찝찝하게 불행하거나, 둘 중 하나잖아.”

현주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민준은 말을 이었다. 

“처음 여기 들어섰을 땐 뭐, 알잖아. 아버님께 동업 제안하려고 왔어. 당연히 여기 있을 줄 알았거든. 현주 씨 가족, 겉으로는 좋아 보였으니까. 근데 와보니까 아무도 없네? 환자를 두고 어디 간 거야? 가게에는 가정사라고 떡하니 적어 놨으면서.” 민준은 틈을 두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다시 올까?  그러면서 돌아갔어. 첫날도 그랬고 둘째 날도 그랬고 셋째 날도 그랬어. 넷째 날에는 솔직히 와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는데.. 딱 마지막으로 가보고 없으면 다른 방법 찾자, 그 생각으로 왔었고. 와. 근데 역시나 없네. 내일부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했어. 근데 막상 내일이 돼보니까 조금은 거슬리는 거야. 아니 도대체 가족들은 어디 간 거야. 어떻게 된 게 내가 아니면 병문안 오는 사람이 없어?”

민준은 다시 뜸을 들였다. 인상을 찌푸리고 힘이 잔뜩 들어간 턱이 할 말은 있는데 잘 나오지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줬다.

“나도 그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어.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병실을 한 번 이상은 방문할 필요는 없었잖아. 아버님이 여기 없으면 연락처를 물어보고 전화 한 통 드리면 될 일이니까. 근데 막.. 혹시, 혹시라도 혼자서 외롭지는 않을까, 그나마 내 방문이 조금은 위로가 됐던 건 아닐까. 뭐 그런 기분이 드는데.. 그걸 어떻게 배신하겠어. 우리 아빠 옆에는 못 있어 줬어도 이번엔 있어 줘야겠다, 싶기도 하고. 괜히 암이라니까 의미 부여 좀 한 건지 뭔지. 어쨌든 그다음부터는.. 솔직히 모르겠어. 뭐가 먼저인지. 내가 당신한테 마음을 갖게 된 게 먼저일까, 보험금 들고 나른 엄마가 생각난 게 먼저일까.” 

민준은 잠시 뜸 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래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어쨌든 간에 내가 당신 보험금에 대해 생각한 건 사실이야. 근데 현주 씨. 사랑을 연기한다는 게 말이 되기는 할까?”

현주는 양손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사랑을 연기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일까. 도대체 진실은 무엇일까. 관계에 돈이 끼어들면 그것은 진심이 아닌 걸까. 사실 현주의 머릿속에는 이따위 난센스 문제들이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과거를 떠올릴 뿐이다. 민둥머리를 덮고 있는 분홍색 비니를 만지작거리며 그날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이거 써요. 어울릴 거 같아서 사 왔어요.”

복슬복슬한 분홍 비니였다. 민둥머리가 보기 싫었던 거지. 현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머리가 부끄럽지 않을 때까지 벗지 마요. 머리가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는데,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움츠러드는 건 별로 보기 안 좋네요.”

비니 하나의 가치는, 그것의 용도는 그의 말로 인해 바뀌었다. 고작 보기 흉한 머리를 감추기 위한 용도가 아니다. 떳떳해지기 위한 수단이다. 이뻐 보이기 위한 수단이다. 더 잘 보이기 위한 수단이다. 언제든 벗을 수 있고, 벗는다고 해서 바뀔 것은 없다. 현주는 그의 말에서 확신을 얻었다. 그가 무뚝뚝하게 내민 분홍 비니는, 진심이었다.


“몰라. 그딴 거 몰라 나는. 그냥 못 들은 걸로 할래.” 

현주는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 못한 채 민준을 바라봤다.

“거짓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니라고 하면 되잖아. 그냥 아니라고, 보험금 따위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너무 쉬워. 그래서 안 돼. 이때까지 어려웠는데 이제 와서 쉬울 리가 없잖아. 행복도 사랑도 원래 다 어려운 거잖아.”

“왜 그래 갑자기. 당신답게 살아 민준 씨. 어? 쉽게 쉽게 살라고 제발.”

“이제 알잖아. 그런 거 없어. 어렵거나 더 어렵거나. 둘 중 하나 선택하는 거야. 이혼하자 우리. 보험 수혜자도 돌려놓자.”

“진짜 왜 그래 당신?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이혼하자는 말은 내가 해야 되는 거잖아. 보험 수혜자 돌리라는 것도 내가 해야 하는 말이잖아. 왜 끝까지 제멋대로야?”

“이해 좀 해. 당신한테 의심받으면서 살 자신이 없어서 그래. 나도 좀 살자.”

“이혼 안 해. 보험도 안 바꿔. 그건 내가 정할 일이야. 도망가지 말고 책임을 져.”

“책임지려고 이러는 거잖아.”

“아니. 책임질 거면 내가 원하는 걸 해. 나한텐 그게 책임이야.”

“.. 어떻게 하면 될까.”

“행복하게 살자. 나 끝까지 행복하게 살다 가게 해줘. 얼마 안 남았잖아. 그때까지만 죽었다 생각하고 일해.”

...

민준은 고개를 숙인 채로 침묵했다. 

“.. 어때.”

그녀의 무미건조한 외마디가 귀에 꽂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덧 거뭇거뭇 해진 그녀의 동그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많이 자랐네. 이쁘다.”

그녀는 웃었다. 웃다가도 울었고 울다가도 다시 웃었다. 


진실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인간의 감정이 섞이는 한, 진실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되고 마는데 말이다.  차라리 믿고 싶은 것을 믿어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해라. 그것만이 이 정신 나간 세상에 대응하는 유일한 생존전략인 셈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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