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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d Oct 18. 2023

인생,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생존전략 ep.11


@민준의 삶


지이이이이잉- 지이이이이잉-


시간은 오후 한 시. 누가 이 시간부터 전화를 해대는 건지, 민준은 빛에 적응하지 못한 눈을 찔끔 뜨고 짜증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고객 1. 이른 시간부터 무례하게 전화를 걸어대는 사람은 그의 첫 번째 고객이다. 

“아 네. 순자 씨.”

“순자 씨 라뇨, 호호호. 선생님도 참. 아니 근데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지금 다른 내담자분이랑 상담 진행 중이라서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조금 뒤에 통화 가능할까요?”

“아휴 바쁘기도 하셔라. 아니 안 그래도 저도 상담이 필요하던 참이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제가 카페를 갔는데 아니 직원이라는 것들이..”

“네네. 순자 씨. 지금은 다른 내담자와 상담 중이라 상담이 어렵습니다. 상담이 급하시다면 제가 내담자와 상담을 끊고 들어 드릴 수는 있는데요. 그렇게 되면 상담비가 두 배로 올라 버려서요.”

“선생님. 제가 지금 얼마나 심적으로 힘든지 아세요? 지금 돈이 문제예요? 돈 때문에 제게 이 힘든 시간을 혼자 보내게 두시려는 건가요? 상담사로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정말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만나서 얘기하시죠.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 나누는 편이 훨씬 좋을 겁니다.”

민준은 전화를 끊고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가야 한다. 그래 두 배 준다는데 가야지. 

....

“아, 가기 싫다.”


민준은 국가대표 계륵을 그만두고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왜 하필 수많은 직업 중 심리상담사가 되었느냐, 그 이유라면 딱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심리상담사가 되는 방법은 다른 어떤 직업보다 간단하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로, 하나는 자신의 의지요, 다른 하나는 심리상담사라는 간판이었다. 심리상담사에 대한 법도, 개업에 대한 법도 없기 때문에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 일의 강도에 비해 벌이가 쏠쏠했다. 뭐 내담자의 방문 횟수에 따라 달라지기야 하겠지만 어떤 직업이 앉아서 얘기 조금 들어주고 돈을 이 정도나 받을 수 있을까. 

그래 그 이유가 전부다. 뭐가 더 필요한가. 되기 쉽고 일이 수월하고 돈벌이 잘되면 그만이지. 

쉽게 간단하게 많이. 그것이 민준이 추구하는 가치였다. 그래서 홍보에도 그토록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민준의 계획은 3주 만에 취득 가능한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하나 취득하고 블로그를 개설하고 이 책 저 책에서 대충 짜깁기한 책을 자비로 출판하는 것이었다. 홍보는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것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게 뭐야. 네이버에 심리 상담을 검색해 보니 뭐 대단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이 사람들이 한 짓을 비슷하게나마 따라 하려 해도 5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이 틈에 끼면 도대체 자격증이 다 무슨 소용이고 책 출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자칫하면 홍보에 쓸데없는 노력을 쏟을뻔한 것이다. 

쉽게 간단하게 많이. 자신이 추구하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기 때문에 민준은 홍보를 포기했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댓글 아르바이트나 고용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리라.

어차피 7년간 수련하던, 방금 블로그만 하나 개설하던 둘은 똑같은 심리 상담사다. 이왕 심리상담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면 최대한 쉽게 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다.

민준은 개인 블로그를 개설하고 짤막하게 몇 마디 적어 넣었다.


*심층 심리상담사. 

*회당 15만 원.

*내담자는 같은 기간 세 명을 넘기지 않습니다.


끝.

민준이 한 일이라고는 그것이 전부다. 그렇게 민준은 심리상담사가 되었다. 자격증 하나 없이 당당히 상담사가 되었다. 

그래 그의 새로운 직업은 시작부터 이상했다.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지이이이잉- 지이이이잉-

그가 블로그를 개설한 지 삼 일이 되던 날. 한동안 조용하던 민준의 휴대폰이 아주 신이 나서 부르르 떨어댔다. 

“네.”

“아, 네 안녕하세요. 블로그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블로그요?”

“네. 그.. 심리 상담 전문가 아니세요?”

....

민준의 심리 상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첫 고객의 후기에 따르면, 홍보는 전혀 없는데 금액이 비쌌기 때문에 믿음이 갔단다. 비싼 것들은 대개의 경우 비싼 값을 한다는 것. 요란한 것들은 죄다 빈 수레라는 것. 이 두 가지가 고객님이 가진 생각이었고, 민준의 블로그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했다. 

그런데 도대체 그녀는 어떤 경로를 통해 블로그를 찾아냈을까. 민준 본인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것 아니던가. 단지 본인이 준비된 사람이었을 뿐이다. 기회가 찾아왔다면 최선을 다해 기회를 살릴 뿐이다. 


첫 상담을 맡게 된 날. 어차피 가격 15만 원은 정해져 있는 값이고, 그 뒤로는 더 이상 진전이 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민준은 자신의 의견을 가감 없이 피력했다. 고객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쉽게 간단하게 많이, 중에서 ‘쉽게’와 ‘간단히’를 위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쉽게 간단하게 많이.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소수의 고객과 깊이 있는 상담을 나누는 것보다는 다수의 고객과 얕은 상담을 나누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근데 참 이상하지. 그 첫 번째 고객님은 다음에도 민준을 찾았다. 그다음에도 찾았고 또 그다음에도 찾았다. 다음에는 주변 지인들에게까지 소개하겠다고 나섰다. 그럴수록 민준의 통장에 찍히는 돈은 커졌지만 그만큼 노동강도도 올라갔다. 

쉽게 간단하게 많이. 아, 어쩌면 그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을까. 그녀와의 첫 만남을 행운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민준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녀와의 첫 상담 날, 민준은 내담자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아들이 이상한 길로 빠지는 거 같아요. 원래는 착실하게 제 일하던 놈이었는데 갑자기 랩이니 뭐니 이상한 걸 하겠다고 설치니..”

“그건 아드님 고민 아닌가요?” 민준이 대답했다.

“아니 아들 고민이 제 고민이죠! 제가 이 문제로 얼마나 많은 상담을 받은 줄 아세요? 근데 다들 뭐 그림을 그려 보라니 과거 얘기를 해보라니 뭐 이상한 것들만 잔뜩 시켜 놓고는 막상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해결해 주지 않으니.. 어우, 돈이 얼마나 아까웠는데요. 아니 다들 카드는 왜 그렇게 뽑으라 하는 거예요? 카드 인물이 어떤 심정일 거 같은지는 왜 묻는 거예요? 아니 그림에 심정이 어딨어, 그냥 그림이지! 그리고. 감정이 어떤지는 왜 그렇게들 물어보는 거예요? 몰라요, 몰라! 그걸 알았으면 내가 스스로 해결했겠지 수고스럽게 이곳저곳 왜 찾아다니겠어요, 진짜!”

그녀의 따가운 목소리가 카페에 넓게 울려 퍼졌다. 민준은 그녀의 목소리가 굉장히 귀에 거슬렸고, 주변의 시선이 부끄러웠다. 첫 상담부터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태도와 말투. 역시 세상에는 쉬운 일 따위 없는 법이다. 고작 15만 원을 버는 일조차도 말이다. 

“근데 또 상담사를 찾았네요?” 

그럼에도 민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그 상황에서 베풀 수 있는 최선의 친절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부모의 손에서 일찍이 벗어나 온갖 경험을 다 해본 그 또한 호락호락한 상대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돈이 통장에 찍히기 전까지는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칼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최대한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일이 해결이 안 되니까 또 찾았죠! 근데 선생님은 무슨 상담비가 이렇게 비싸요? 비싼 만큼 효과는 있겠죠? 제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비싼 것들은 다 제값을 하거든요.”

“네 뭐. 그건 고객님이 판단하기 나름이죠. 이제 고객님 고민을 들어볼게요.”

“방금 말했잖아요? 아들이 자꾸 이상한 길로 엇나간다니까요?”

“그러니까 고객님 고민은 없다는 말씀이죠?”

“아니 그게 고민 이라구요!”

“네. 그럼 이쪽으로 입금부터 해주시겠어요? 가격은 적혀있다시피 15만 원이구요. 선불인 걸 미리 말씀 못 드렸네요.”

“아니 제가 뭐 돈 안 주고 도망칠까 봐 그래요? 이 사람이 진짜!”

해외 명품 브랜드로 도배한 50대 아주머니는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민준에게 15만 원을 전송했다.

“됐어요?”

됐다. 칼이 넘어왔다. 

“네. 됐습니다.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죠.” 

“네? 무슨 말도.. 저기요! 저기요!!”

민준은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돌아서다 한마디 건넸다.

“좋게 생각해요, 좋게. 그럼 좋은 게 되는 거니까.”

“뭐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그것이 고객 1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작은 키에 포동포동한 덩치.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명품 브랜드로 도배된 몸뚱이. 사나운 성격을 대변하는 쭉 째진 눈과, 성격만큼이나 배배 꼬인 단발에 파마머리. 진한 화장과 화장으로 가려지지 않는 더러운 인상. 찢어지는 목소리와 무례한 성량. 

민준은 이런 사람에게 15만 원이라는 거금을 아무렇지 않게 송금받았다. 온갖 창피를 다 겪기는 했지만 뭐. 어쨌든 이런 사람이 제 배나 불려 가며 잘 살고 있다니. 민준은 그날의 일을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빈부격차의 해소를 위해 힘쓴 한 명의 시민일 뿐. 뭐 그 내담자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근데 참 이상하지. 그녀도 그날의 일을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콜럼버스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것처럼, 민준 또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상담사로서의 성공에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날이 있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휴식을 즐기던 민준에게 다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는 맞는데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네 선생님. 잘 지냈죠?” 

찢어지는 목소리에 무례한 성량. 그 아줌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저번에 감사하다는 말을 못 드렸던 거 같아서요. 선생님 말씀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정말 그렇더라구요. 아니 내가 왜 그 방법을 생각 못 했지? 아니 저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좋게 생각하면 좋은 게 된다고. 그래 맞아요, 그게 그렇게 기똥찬 방법이지 뭐예요? 제가 딱 아들한테 이렇게 말했거든요. ‘너 랩이니 뭐니 입 밖으로 한 번만 더 내봐. 그럼 용돈 절대 없어.’ 그랬더니 아들이 따박따박 우기는데, 제가 거기다 대고, ‘좋게 생각해 좋게! 그럼 좋은 게 되는 거야.’ 하니까 이놈이 안 좋은 걸 어떻게 좋게 생각하냐고 또 따지지 뭐예요? 그래서 ‘좋게 생각할 때까지 용돈 없는 줄 알아!’ 하고 호통 한번 쳤더니 이제는 모든 게 좋게 생각되니 용돈 좀 달라지 뭐예요, 호호호호.”

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어머니가 이해하셨다니 다행이네요.”

“에이 어머니라니요! 나이는 먹었어도 감성은 아직 소녀랍니다, 호호호호. 아니 근데 왜 그렇게 꼬아서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아. 그러셨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깨닫는 거죠.”

“맞아요! 그건 정말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

그날 후로 민준의 수입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아주머니의 활발한 성격은 ‘심리 상담사 박민준’을 이 동네 저 동네에 퍼뜨렸고, 여러 동네에서 민준은 권위 있는 상담사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인다는 사실이었다. 이 틀림없는 사실이 민준의 발목을 잡아챘다. 그가 권위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보통 고객 1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뿐이었던 것이다. 

듣기로는 그녀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카페도 있단다. 카페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초기 멤버들의 권력이 상당하니 어쩌니 하는데 그 카페가 지역적으로 커다란 영향도 끼친단다. 그녀들이 영향을 끼친 다라.. 민준은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뭐. 어떤 카페 인지는 몰라도, 돈벌이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 그런 것들쯤이야. 민준에게는 그런 사회적 문제 외에도 고민할 것들은 차고 넘쳤다. 


‘아.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어느 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리상담사로 얼마나 오랜 시간 달려왔는가. 근데 내가 하고 있는 게 심리 상담이 맞기는 한가?

뭐 그건 상관없다. 중요한 건 돈이 얼마나 들어오는가 하는 것이고 얼마나 쉽게 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니. ‘근데 이게 많이 버는 일은 맞는 데 쉬운 일은 아니잖아.’

정말 그랬다. 민준이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의 내담자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고객 1과 비슷한 부류인데 이 부류가 어떤 부류인가. 심리 상담이 무조건 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면서도, 심리 상담이 무의미한 사람들이다. 많은 심리상담사들을 회의감으로 밀어 넣는 장본인이며 서비스직에 종사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친절’을 지워 버려야만 직성이 풀리고야 마는 사회의 골칫덩이 같은 존재이다. 민준이 하는 일은 이들의 억울한 점을 들어주고 합리화하고 다시 당당하게 진상 짓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사회악을 양성하는 일이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목소리 크기를 조절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불만이 생기면 절대 가만히 넘어가는 법이 없는데, 이들이 불만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눈을 부릅뜨고 코를 킁킁대며 불만 거리를 찾는데 그 레이더가 얼마나 훌륭한지, 그들의 콧구멍이 공기를 삼킬 수 있는 한 불만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들어준다 생각해 보라. 

이 일은 정말이지 박민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그들의 지갑에 있었고, 그의 머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본인의 입장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정과 일을 분리할 줄 아는 진정한 프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민준도 이 일을 그만두려 한다. 오늘의 상담을 마지막으로 심리상담사.. 아니 사회악을 양성하는.. 아니 사회 소수자들의 마음을 보살펴주는 일을 그만두려 한다. 이유는 그들의 버릇이 민준의 사업에도 점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상담 시간은 점점 길어지는데 비용은 똑같이 지불하거나 어떻게든 깎아 먹으려 드는 이 파렴치한 인간들. 여태껏 민준이 그들을 고객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에 있어서만큼은 병적으로 쿨했기 때문이다. 

“요금은 선불입니다.”

“아니 내가 돈 안 줄까 봐 그래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자, 됐어요?”

..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입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요.”

“뭐요? 아직 할 말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그런 소리를 해요? 돈 때문에 그래요? 돈 더 주면 되잖아요!”

그래 그때는 참 좋았지. 근데 그녀들이 변했다. 언젠가부터는 요금을 깎아 먹으려 하고 단골이니 뭐니 하면서, 돈줄이니 뭐니 하면서 무료상담을 요구한 것이다. 

혹시 모른다. 오늘도 후불을 요구해 놓고는 나중에 가서 깎아 먹으려 들지도. 그게 도둑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민준은 사기, 도둑질 그런 것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민준은 샤워를 마치고 로션을 덕지덕지 발랐다. 잠에서 깬 지 고작 20분이라 정신은 아직 몽롱하고 몸은 축 늘어졌다. 아. 그래도 현장에 나가는데 준비도 없이 나갈 수는 없다. 머리도 손질해야 하고 깔끔한 정장도 챙겨 입어야 한다. 근데 왜 이렇게 귀찮지? 

근데 꼭 나가야 하나? 그래 어차피 돈을 받아야 한다면, 상담 후에 받는 것보다는 상담 전에 받는 편이 좋지 않을까? 선불을 받아내고 상담을 진행하는 것보다는 선불을 받아내고 휴식을 진행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무엇보다 마지막이니까.

마지막 상담은 무엇보다 의미 있어야 한다. 일을 시작한 날부터 점점 잃어갔던 중요한 가치들. 쉽게 간단하게 많이. 마지막만큼은 그렇게 끝나야 되지 않겠는가.

민준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뚜루루루..뚜루루루...


“네 선생님? 오고 있나요?”

“네 순자 씨. 안 그래도 상담 중이던 내담자분께 말씀은 드렸는데요. 이 내담자분이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지금 당장 환불해 주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난리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상담이 힘들 것 같습니다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랑 한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씀이에요? 그건 아니죠 선생님. 이렇게 나오시면 저도 환불을 받아야겠네요!”

“저는 환불해 줄 돈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어쨌든 이요! 지금 당장 오지 않으면 그 내담자인지 뭔지 하는 년이 신고하기 전에 제가 먼저 신고하겠어요!”

“그럼 일단 입금부터 해주시겠어요?”

“제가 왜요!”

“아니면 갈 수가 없거든요.”

“와, 이 사람 진짜 어이없는 사람이네? 저기요! 지금 제가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선생님이 아세요? 아니 지금은 선생님 때문에 더 힘들어지려 하네요! 아이고 머리야!!”

“입금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뚝.

민준은 전화를 끊었다. 

역시. 이 일을 그만둔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출근길에 오르지 않은 것도 참 잘한 일이고. 무엇보다 돈을 받아내는 일이 저번보다 힘들어졌으니까. 

2년간의 시간 동안 그는 너무나도 지쳤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라 할지라도 2년 내내 빡빡하게 잡힌 스케줄과, 스케줄 내내 높은 강도를 유지한 정신노동은 그의 몸에 회의감과 피로감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민준은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는 나가야 할 이유도 없어졌고, 무엇보다 인간은 효율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생각은 서서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할 수 있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역시 누워서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자, 이제 어떻게 할까. 민준에게는 다시 고민의 시기가 찾아왔다. 이직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럼에도 그에게 걱정은 딱히 없었다. 2년간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당분간은 휴가를 즐겨도 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기도 했고, 여태까지의 경험이 돈은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 일종의 법칙 같은 것을 깨닫게 해 줬기 때문이다. 

자. 그럼 어떤 일을 해볼까.

아니. 때로는 어떤 일을 할까, 하는 생각보다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하는 생각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민준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이전에 이루지 못한 꿈에 다시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쉽게 간단하게 많이. 젊은 시절엔 도달하지 못했던 그 이상향. 지금은 어떨까.

그래 민준은 쉽고 간단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 일하지 않아도 돈이 들어오는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 사장님 소리도 한번 들어보고 싶다. 충분히 그럴 자격 있잖아?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떠올릴 때는 이렇듯 큼지막하고 높다란 것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다음은 그것이 문제였다. 

해온 일이라고는 요식업 쪽에서의 경험과 상담사로서의 경력뿐인데. 음..

요식업 쪽이라면 방법이 없지 않다. 그쪽은 가게 하나만 내도 사장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근데 가게는 어떤 가게를 차려야 하나.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생각해 보면 요식업 사장은 쉬는 날이 거의 없지 않나.

...

그럼 이건 어떤가. 이미 보장된 가게가 하나 있고, 일은 죄다 직원에게 미룰 수 있게끔 만든다면? 그럼 모든 조건을 만족하지 않나? 

오케이 그럼 이제 다음으로. 어떻게 이미 있는 가게에서 사장님 소리를 들을까. 거기엔 이미 사장이 하나 있을 텐데. 체인점을 열어야 하나? 근데 그럼 또 실패할 가능성이 있지 않나?

그럼 이건 어떤가. 특별한 소스를 가진 맛집을 찾아서 체인을 열어버린다면? 그리고 거기서 소스를 만드는 비법을 배운다면? 하다못해 받아쓸 수만 있다면? 그다음 그 소스를 이름만 바꿔서 팔아 치우면..?

“됐다. 이거다.” 

민준의 머릿속에서는 이제 계획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줄 생각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구석진 동네에 가게를 차리면 월세도 적게 들고 작업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직원은 역시 패기 넘치고 우직하게 열심히만 하는 놈으로 구해야 한다. 그래야 일도 열심히 할 거고 여차하면 떠넘기기도 좋을 테니. 그럼 비법 소스 이름은 뭐라 할까. ‘O가 마약 소스’. 그래 괜찮네. O에는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직원의 성씨를 붙이는 거다. 그럼 리스크는 한층 더 줄어들게 되고 일도 딱딱 풀릴 것이다.

민준의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생각이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부정적인 것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므로 걱정이 계획을 막아서기 전에 허술하게나마 짠 것들을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했다. 일이 틀어지면 거기에 맞게 착착 해결해 나가면 되리라.


민준은 머리를 세팅하고 청바지에 발을 밀어 넣고 흰 티를 집어 들었다. 사업 미팅이 있을 예정이지만 옷에 대해 딱히 고민하지는 않았다. 수많은 옷을 경험한 결과, 그에게 맞는 옷은 튀지 않는, 너무 무난해서 옷보다는 핏과 얼굴에 집중될 수 있는 옷이 그에게 알맞은 옷이었다. 그만큼 그는 핏과 얼굴이 훌륭했다.

얼마나 훌륭하냐고 묻는다면, 그의 얼굴에는 신뢰가 전혀 없음에도 모두가 미모에 집중하는 탓에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만큼 훌륭했다.


민준은 집을 나섰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전용 주차장에 대기 중인 bmw x5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국가대표 계륵. 어쩌면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계획을 먼저 떠올리고 그 가게를 떠올린 게 아니라, 그 가게를 알고 있었기에 그런 계획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뭐 사실 이런 부류의 문제는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어쨌든 민준은 몇 년 전 일했던 닭갈비 집 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국가대표 계륵. 민준의 새로운 꿈을 이루어줄 곳이다. 


국가대표 계륵의 사장님을 설득하는 과정은 어땠을까. 그는 흔쾌히 허락했을까, 몇 번이나 설득해야 했을까. 몇 번이나 설득해야 했다면 나는 설득 대신 어떤 방법을 시도했을까. 

민준은 오랜만에 찾아온 가게 앞에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처음의 계획은 대부분의 경우 틀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의 기대에는 아무런 힘도 없고, 만약 있다 해도 거기엔 실망의 크기를 키우는 힘밖에 담겨있지 않다. 가게 앞에 붙은 한 장의 종이가 말해 주는 것처럼.


-가정사로 인해 당분간 쉽니다.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더 맛있는 국가대표 계륵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가정사. 어떤 가정사가 김재위 씨의 열정을 막아섰을까. 따님 졸업식에도 가게는 열던 사람이었는데. 민준은 실망했다. 불과 10분 만에 짠 계획이라 해도 계획은 계획이니까.

“어이구, 총각. 거기 문 닫았어요.” 

뽀글뽀글한 짧은 머리에, 통통한 덩치에, 작은 키에, 밝은 분홍색 패딩에, 툭 튀어나온 뱃살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목티. 진한 눈썹 화장에 분홍 립스틱.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숨기지 못한 성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32년간의 경험상 피하는 게 좋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네.” 저도 압니다.

민준은 다시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종이에 다른 게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줌마가 지나가길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어이구, 세상도 참 야속하지. 저기 딸내미가 집 밖을 나오는 꼴을 못 봤거든. 딸이 그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엄마 아빠라는 양반들이 가게에나 붙어있으니, 그 사단이 안 날 리가 있나!”

민준은 아줌마의 찡그려진 얼굴을 쳐다봤다. 그래. 차라리 전보다는 자연스러운 얼굴이었다.

“총각도 조심해. 아직 서른도 안 된 건강한 사람이 암에 걸릴 줄 누가 알았어?”

“암이요?”

“어이구? 뭐 젊은 사람은 암 안 걸려? 그런 거 없어, 이 사람아. 저 옆집 저, 누구야. 숙자 씨 아들내미는 이제 고작 마흔다섯 인가 그런데 잠결에 그냥 그대로 가버렸다잖아. 이유 뭐 그런 거 없어, 그냥 갈 사람 가는 거지. 어이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데려가야 할 사람은 안 데려가고 그놈이 얼마나 착한 놈이었는데 그놈을 데려가고 그러는지..” 훌쩍.

“어디로 입원했는데요?”

“왜, 이 집주인이랑 아는 사이 인가 보지?”

“네, 같이 일할 사람입니다.”

“같이 일할 사람? 뭐 직원이야? 그 뭐야, 오성 병원? 그쪽에 입원했다고 하던데. 어이구, 그 병원은 일을 잘할까 몰라. 아니 안 그래도, 우리 조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나 뭐라나 어쨌든 저기 저 커다란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니 글쎄 그 병원에 의사라는 것이..”

암. 암. 또 암. 지긋지긋한 이름이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붙여줄 수 있는 병명은 그것뿐인 걸까. 민준은 오성 병원을 목적지로 정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료를 더럽게 못 본다고 하네? 병원에 있어도 달라질 게 없으면 뭐 하러 병원에 데려가겠어?” 아줌마는 민준의 뒤통수에 대고 거의 소리쳤다. 

“어이구,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어. 어른이 말하는데 쯧..”

민준은 차에 올라타 다시 시동을 걸고 악셀을 밟으며 생각했다. 근데 가능성이 있기는 한 걸까. 체인점 따위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띠링

최*자 11/27 15:07

입금 300,000원.


...

그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일단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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