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확행
나는 티브이가 있어야 비로소 집이라고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자취를 하는 공간은 티브이가 없기 때문에, 집이 아니다. 내가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본가의 안방에서는 늘 예능 프로그램이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다.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예능 중독자이기 때문이다. 예능에 중독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 중 가장 큰 것은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주기 때문일 거다.
값싼 행복에 둘러싸여
나는 왓차 플레이 정액권을 자동결제 해놓고 거의 매일 같이 무언가를 본다. 한 달에 겨우 커피 한 잔 값만 내면 정액권을 사서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내게 주입할 수 있다. 직접 어딘가에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내 스마트폰에서, 내 노트북에서 늘 영상이 흘러나온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영상물들이 내 수면권을 침해하고 있다. 나는 기꺼이 침해 당한다.
어느 순간부터 느끼기 시작한 변화가 있다. 혼자 자취를 하는 공간에 가면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티브이의 좋은 점은 뭐라도 틀어놓으면 계속 시끄럽다는 점이다. 노트북은 내가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해서 틀어야 한다. 한 번 틀고 나면 자동으로 연속 재생이 되기는 하지만 사실 매일 무언가를 고르는 것조차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봤던 것을 또 본다. 보고 또 보고 또 본다. 나는 이 증세가 일종의 정서 불안임을 깨달았다.
완벽하게 소음이 통제된 공간에서 내가 혼자인 것을 오롯이 느끼는 것은 괴롭다. 나는 값 싸게 결제한 왓챠 정액권을 통해서, 대면 해야 할 외로움과 괴로움을 회피하고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취한다. 잘 귀에 걸리지 않는 외국어로 나오는 영상을 틀어 놓고 멍을 때리는 한이 있어도, 무언가를 틀어야지 마음이 편하다. 조용한 곳에서 고독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쓰러져 잠들기 전까지 어려운 책이라도 읽고 있겠다고 생각한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내가 값이 싸다고 표현한 것은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싼 게 비지떡이라고 말하면서 값싼 걸 나쁜 것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값이 싸다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값이 싼 것은 보통 그 효과나 그 자체의 수명이 오래가지 않는다.
행복
소확행이란 어려움을 거세시킨 행복이다. 오래가지 않을 행복, 그래서 불안한 행복 그래서 그것이 지금 당장의 행복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재밌는 영상 하나가 끝나면 검어진 노트북 화면에 비칠 웃고 있는 얼굴과 대면해야 한다. 이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나면, 이 여행을 다녀오면, 비싼 음식들을 먹으면, 고급 옷을 사버리면, 등등등.....설사 당장의 행복을 비싸게 주고 샀더라도 소확행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산 행복은 분명 값싸다. 정신이 드는 순간, 줄어든 통장 잔고와, 줄어든 시간과, 줄어들거나 달라진 무언가와 씨름해야 한다.
괴로움과 함께 지속 가능성을 거세 시킨 행복.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선택한 행복. 소확행은 그런 행복의 새로운 명칭인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