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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핏 Dec 29. 2018

글을 내 것으로 만드는 방법

송수권, 산문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이 시는 1975년 <문학사상>에 이어령 씨가 소개하면서 문단에 소개된 송수권 시인의 시 <산문에 기대어>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메란 그림자의 옛날 말이고, 산문은 산의 입구를 뜻하는 한자어다. 못물은 물이 고인 웅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며 산다화는 동백꽃을 말한다. 모두 조금은 낯설지만 상당히 예리한 단어들이다. 그래서 이 시는 별 수 없이 가슴에 박힌다. 


 시를 읽어 보면 길지 않은 시의 한 줄 한 줄이 제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웅덩이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가장 가슴을 후벼대는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라는 한 줄일 것이다. 말을 아끼던 시인이 두 번이나 반복하는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라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비단 그리움만이 아니다. 절절하고 오래 묵힌 슬픔이다. 


 가끔 나는 나를 흔드는 시들을 필사 하고는 하는데 그러고 나면 마치 내가 그 시를 쓴 사람처럼 깊이 있게 시가 느껴진다. 그래서 저 시를 굳이 손으로 종이 위에 옮겨 적으면서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시 속의 누이는, 그 시절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동생을 생각하며 쓴 것이라 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나서 한참동안 그 허망함 아래 가라앉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를 손으로 옮겨쓰며 자신이 이 시를 쓴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시라는 장르의 깊이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는 이처럼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는 데 오롯이 그 정수가 담겨 있다. 좋은 시는 말하지 않고 다만 울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내 글보다, 필사에 관한 벤야민의 글을 옮겨볼까 한다. 


"국도는 직접 걸어가는가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그 위를 날아 가는가에 따라 다른 위력을 보여준다. 텍스트 역시 그것을 읽는지 아니면 베껴 쓰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다르게 나타난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연 풍경 사이로 길이 어떻게 뚫려 있는지를 볼 뿐이다. 그에게 길은 그 주변의 지형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펼쳐진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그 길의 영향력을 경험한다. 비행기를 탄 사람에게는 단지 펼쳐진 평원으로만 보이는 지형의 경우 걸어서 가는 사람에게는 길은 돌아서 가는 길목마다 먼 곳, 아름다운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숲 속의 빈터, 전경들을 불러낸다. 마치 전선에서 지휘관이 군인들을 불러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가 원시림을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서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필경사는 문자문화의 비할 바 없는 보증인이며, 필사, 즉 베껴 쓰기는 중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발터 벤야민 <일방 통행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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