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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핏 Jan 13. 2019

지독한 삶의 지속-영화 <토리노의 말>

가장 지독한 것은 삶이 지속된다는 사실에 있을지 모른다

<토리노의 말> (2011)(감독: 벨라 타르) 

 2011년 전주영화제에서 많은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보게 만든 명작은 토리노의 말 뿐이었다. 영화관은 거의 한, 두석 빼고는 꽉 찼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영화구나, 싶었다. 현장예매를 한 탓인지 스크린과 정말 가까운 맨 앞자리에서 보게 됐다. 목이 굉장히 아팠으며 눈도 뻐근했다. 무엇보다 스크린의 바로 아래서 본 탓에 모든 장면이 로우 앵글로 보였다는 점이 아주 아쉽다. 영화관에서 개봉한다면 다시 보러갈 것이다. 


 토리노의 말의 첫머리에는 니체의 일화가 인용된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 머물던 니체는 마부가 고집 센 말에게 마구 채찍질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니체는 사건 한복판에 뛰어들어 말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흐느낀다. 숙소로 돌아온 니체는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긴 뒤 10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 세상을 뜬다.  그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되며 말이 끄는 수레를 탄 늙은 남자가 등장한다. 말의 얼굴부터 온 몸을 훑는 롱테이크는 나를 압도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움직이는 말의 근육 하나까지 잘 나타나는 카메라 워크가 눈에 띄였다. 카메라는 아주 부드럽게 이동하며 말의 얼굴부터 늙은 남자의 몸까지를 훑는다. 스크린 바로 앞에서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거대한 이미지가 다가와서 압도되었다.


 토리노의 말에는 자극적인 어떠한 것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약 두 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동안 엄청난 서사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의, 식, 주 만이 반복적으로 등장할 뿐이다. 딸이 아버지에게 옷을 입혀주고 벗겨주는 것. 딸과 아버지가 삶은 감자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 딸이 바람을 뚫고 아침마다 뜨러가는 물. 우물. 그들 삶의 터전인 집과 마구간과, 황무지. 매서운 바람이 부는 황무지. 그들의 삶과 다름 아닌 말. 나오는 것은 정말 이것이 다다. 중간에 나오는 집시가 그나마 튀는 존재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는 삶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가 있으며 관객을 영화 속의 시간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이 있다. 공간의 이동도 거의 없고 화면은 무겁다. 약간씩 로우앵글로 잡은 컷들이 많은데 사람을 위주로 잡았다. 색감은 거의 흑백에 가까운 칼라다. 아니, 흑백영화라고 하는 게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감독이 힘을 줬다고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주연 배우 두 명이 몇 시간을 나와도 몇 마디 밖에 하지 않던 대사를 약 오 분에서 십 분 정도만 나오고도 주연배우를 능가하게 많이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나온 장면이 인상 깊었다. 약초 술을 받으러 와서 정작 약초 술을 받는 것은 차치하고 존재론적 고민들을 내뱉고 간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러니까 현실을 논하면서도 철학적 명제들을 많이 내뱉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비판했다. 그렇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그는 떠났다. 영화는 그가 황무지를 거쳐 지나가는 뒷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벨라타르, 그는 거장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했다. 은퇴작으로서 완벽한 작품이다. 더 이상의 영화를 남기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그를 늦게 알았다는 사실이 슬펐으며 이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영화인으로서의 삶을 끝내고자할 때 나는 시작한 것이니 참, 아쉽다.

  토리노의 말은 아주 기본적인 것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오히려 더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그 작품이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에서 감독의 연출력에 놀라게 된다. 모든 장면에 감독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며 철저히 장악하고 있었다. 


 6일간의 기록. 롱 테이크. 하루는 충분히 길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반복된다. 처절하게 반복되며 처절하게 살아가고자한다. 허무하다.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더욱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하더라도 영화 속 부녀는 허무에 지지는 않으며 모두 부질없다, 라며 엄살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저, 살아간다. 거의 똑같은 하루의 면면 동안에 말은 점점 죽어가고 가끔 누군가 다녀가는 것 외에 변주는 없다.   

 끼니를 해결할만한 것은 감자뿐이다. 아버지는 불편한 한 손을 쓰지 않은 채로 감자를 먹기 위해 아주 뜨거운 감자를 필사적으로 분해한 뒤에 조금씩 먹는다. 아주 조금 먹는다. 그의 큰 덩치가 이해되지 않을 만큼 조금 먹는다. 형식적 식사가 끝난 후에 그는 창문 앞으로 다가가 앉아서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본다. 마치 그리워하듯. 바깥을 향한 갈구가 그 또한 있었을 것이다. 말이란 이동수단이고 그가 말을 소중히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바깥에는 바람 뿐이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간다. 그들의 6일이 2시간 가량 화면에 담겼을 뿐인데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산업혁명 이전이지만 그들의 삶은 이미 기계적이다. 


 말은 밥을 먹지 않으며 점점 죽어가고 부녀는 힘들어한다. 말이 상태가 안 좋기에 그들은 이동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집 안에 거의 갇힌 거나 다름 없게 된다. 우물은 말랐다. 그들을 이동을 해보려 시도한다. 말은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다시 돌아온다. 화면은 더욱 검어졌다. 물도 없고, 남은 것은 감자뿐이다. 그들의 몰골은 점점 검어져간다. 마지막 장면은 그들이 삶지도 않은 생감자를 그릇에 올리고 ‘먹어야만 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먹어야만 해’라는 다섯 글자가 그렇게 다가올 줄 몰랐다. 울 뻔 했다. 부녀의 형상이 페이드 아웃되며 영화가 끝났다. 사람들은 숨죽였다. 엔딩 크레딧이 끝난 뒤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이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졌던 마음을 잃을 뻔 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가 내게 초심을 되찾아 줬다. 


  아마도 니체의 일화 때문에 제목을 토리노의 말이라고 지은 것 같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말은 헝가리에 있다. 아마도. 등장인물들이 모두 헝가리어를 쓰고 있으므로 나는 그렇다고 느껴진다. 그렇기에 의문이 든다. 이 영화의 배경은 무엇인가. 알아서는 안 되거나 몰라도 된다. 이 영화의 배경은 벨라 타르가 만들어 낸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이자 체계이다. 무언가 뜬 구름 속이지만 그 안에서 치열하게 리얼리즘의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헝가리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한 나로서는 부러움과 함께 의문 하나가 들었다. 이 영화는 헝가리의 감성으로 만든 것인가. 아니면 벨라 타르 자신의 독특한 감성인가. 어느 쪽이건 나는 이런 감성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부럽다. 요즘의 세상은 이렇게 세상이 멈춘 듯이 살아갈 수 가 없다. 모든 것이 팝(pop)적이고 수명은 짧다. 깊은 것을 찾기가 힘들다. 나는 이런 것을 상상해 내지 못했다. 삶을 아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느낌이란 생각이 든다. 삶을 치열하게 살아봤기에 단순화시키면서도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서사는 서사화 시키지 않은 서사다. 우리의 삶은 사실 별다른 서사가 없다. 그저 흘러가고 반복될 뿐이다. 여태껏 우리는 그러한 삶 속에서 인위적으로 스토리를 뽑아내왔다. 그러나 벨라 타르는 삶이 서사화될 수 없음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6일간, 반복되는 삶.


  가장 무서운 것은, 삶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 부녀의 삶에서 어떠한 재미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과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살아간다는 것. 이것은 축복이자 저주다. 어떤 생각을 갖고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허무해진다. 이 허무에 지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허무의 철학자 니체를 끌어들여 영화를 시작한 토리노의 말. 나를 허무하게 만들며 영화는 끝이 났지만, 해석되지 않는 공백을 남긴다. 아주 많은 사람이 봐주지 않아도 좋으니, 나는 언젠가 이런 식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 전에 벨라 타르의 영화들을 찬찬히 감상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이 영화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 영화가 나를 매혹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에 매혹 당했다. 따라서 이 리뷰는 감상보다는 찬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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