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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핏 Apr 29. 2019

작은 추억

청구회 추억을 읽고

남의 추억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알려면, 타인과 대화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접경험을 좋아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가상의 추억을 자신의 추억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기도 한다. 드라마 폐인이 생겨난 것은 진짜보다 그럴듯한 가짜 추억에 심취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고, 그 증상 또한 깊었음을 드러낸다. 모두의 삶이 드라마만큼 재밌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사건은 한 가지더라도 겪은 이 각자의 추억은 제각각이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한다. 한 가지 사건을 겪은 사람이 100명이라면 100개의 추억이 생기는 것이다.


 어제까지 모르던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은 쉬운 경험이 아니다. 사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영화나 소설만큼 압축적으로 완전한 타인의 내밀한 경험을 전달받기는 쉽지 않다. 영화는 어쩌면 남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던 인간의 습성이 고도로 발달해 낳은 산물인 것이다. 나 역시 내 것만큼 소중한 타인의 추억을 되도록이면 자주 듣고 싶다.


내 추억


  내 추억을 생각해본다. 수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마음에 남아서 두고두고 떠오르는 그런 추억 말이다. 시시콜콜해서 감히 남에게 이야기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어린 날의 추억. 잊으려고 애를 썼던 몇 년 전 겨울의 일. 뭐 그런 것들. 잊지 못하는 마음이 기억을 만들었다면, 잊고 싶은 마음이 기억을 추억으로 각색하는 것은 아닐까. 추억이란 어떻게 보면 내가 삶을 재료로 하여 만들어 낸 이야기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아주 오래된


 초등학생 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서툰 어린이였다. 어린애가 서툰 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때의 나는 어린이로서의 삶 밖에 몰랐기에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학기 초에 소풍을 간 날이었다. 나는 친구가 사귀고 싶었고 무리를 이룬 다른 아이들의 틈에 섞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타인은 무서웠다. 다들 나에게 친절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여자애들 무리에 끼어들어 꿋꿋이 친한 척을 하던 중에 지나가던 새가 내게 똥을 뿌렸다. 눈물이 났지만 울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연한 척을 했다. 그런데, 새똥 냄새가 난다고 애들이 나를 다 피하기 시작했다. 

 그 날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그때 딱 한 명의 아이가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주었다. 그 애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아파서 1년 늦게 학교를 들어온 애였다. 나는 그 애와 친구가 되었다. 


 위에 쓴 작은 추억은 정말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괴로운 기억에 속했지만 몇 년 뒤에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이따금씩 이 날을 떠올렸다.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청구회 추억


 다들 이런 추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개정판에 수록된  '청구회 추억'은 이런 추억 중 한 가지다. 

 내용은 신영복 선생이 숙명여대 강사를 하던 시절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게 된,  문화동(지금의 신당동 일부) 사는 국민학교 학생들과의 인연을 담고 있다. 선생은 66년부터, 감옥에 들어가는 68년 7월까지 국민학교 친구들과 매주 한 번씩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는 모임을 가진 바가 있다. 

 

 그런 선생이 68년 7월에 옥살이를 시작하며, 연락이 끊기고 만다. 선생은 옥에서 지급하는 재생 휴지에 '청구회 추억'을 썼다고 한다. 신영복 선생이 20년 20일 간 계셨던 감옥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 공간이었고, 그는 그 안에서 삶과 인간을 배웠다 말한다. 


 '청구회 추억'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도 결이 다르고, 그래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여러 해 뒤에 신영복 선생이 내놓은 강의록  <담론>에도 해당 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선생은 출소 몇 년 뒤인 93년 경에 '청구회(초등학생들과의 모임 이름)'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의 초등학생 중 하나를 만난다. 그러나 몇십 년 전의 청구회 꼬마 친구는, 회원 친구들이 이미 오래전에 모두 연락이 끊기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한다. 희미한 풍문이나 겨우 듣는다고.

 삶이 다 그런 거지, 하고 넘어가면 좋으련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 이야기로부터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가 파생된다.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나 온갖 역사의 곡절을 겪은 달동네의 아이들이 어떤 삶의 경로를 지났을지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물론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남의 추억은 내가 겪어보지 않은 시공간으로 나를 여행 보내 주고, 추억에 대한 생각거리를 찾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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