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Van을 타고 이동한 끝에 Kyryz Host란 숙소에 도착했다. 체감상으로 서울-부산 5시간보다 더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13명이 다닥다닥 붙어서 이동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이곳이 과연 한 나라의 수도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가로등 불빛이 거의 없고, 진짜 20년 전 내 시골 외갓집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못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극한 상황에서도 재밌게 잘 살아남는 오지 전문가 아닌가! 그리고 이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인줄 알았는데, 나름 2성급의 호텔이었다. 충격적이다. 호텔인데 여자 5명이 한방을 쓰고, 나머지 8명의 남자들이 한방을 썼다. 심지어 남자 방에는 침대 매트리스도 모자라서 누군가는 찬 바닥에 패딩을 입고 이불 덮고 자야만 했다. 물론 나는 이런 내기에 있어서 항상 중간은 가기 때문에 프레임이 없는 매트리스 자리를 차지했다. 비록 열악했지만, 재밌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캠핑온 기분이랄까? 아니면 마치 수련회를 온 기분이 나서 이런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그 시절 우리는 낯선 공간에서 모두 하나였다.
무려 2성급 호텔이었던 Kyrgyz Host 숙소
키르기즈스탄 땅에 발을 내디디면서 감상에 젖었던 것도 잠시, 배꼽시계가 울린다. 점심도 차 안에서 대충 먹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다. 방 배정 후, 짐을 내려놓고 Ben을 따라 이동한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줄 알았는데 걸어간다. 계속 걸어간다. Ben을 제외한 12명 모두 배고픈 상태라 걸으면서 투덜거린다. 하지만 숙소가 있는 지역은 외곽 지역이라서 시내까지 가는 택시가 거의 없단다. 금방 도착하니 따라오라면서. 가로등이 거의 없는 지역에 차량 전조등을 가로등 삼아 차도 지나가지 않으면 휴대폰 조명을 길라잡이 삼아 씩씩하게 걸어간다. 현지인들이 우리 13명이 일렬로 쫄래쫄래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웃겼을까?
20분도 넘게 지났다. 갑자기 비도 내리기 시작한다. 이슬비 수준이 아니라 몸이 젖을 수준이다. 패딩을 입고 나왔는데, 겉옷이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키르기즈스탄 입성 신고식인가. 내용상으로는 크게 관련 없지만 운수 좋은 날이란 소설이 떠오르면서 이 순간 내가 소설 속의 주인공 '김첨지'가 된 것 같다. Ben에게 물어본다. "How long time is it left? I'm Ungry!!". 여기서 Ungry란 단어는 우리끼리 만든 은어인데 "Hungry + Angry"이다. 그러자 Ben은 거의 다 왔다며 5분만 더 가면 된다고 말한다.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한참 남았지만, 독려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배고프고 춥고 비도 오고 최악의 날씨다. 남자인 나도 힘든데 여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며 모두가 다 같이 으쌰으쌰 걸음을 맞춰준다. 여행 와서 전우애를 발휘하고 있다.
환전소와 전통 빵집이 한 건물에서 공존하고 있다
키르기즈스탄 시내는 어둡다, 너무 어둡다
드디어 비슈케크 시내 쪽으로 입성한 것 같다. 그렇지만, 여전히 도심은 어둡다. 진짜로 어렸을 때 외갓집에서 밤에 봤었던 어두운 가로등의 연속이다. Ben에게 물어보니 키르기즈스탄은 원래 이렇게 어둡다고 한다. 그나마 이곳이 수도라서 굉장히 밝은 것이라고 했다. 불빛이 어두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키르기즈스탄은 천산산맥 위에 위치한 이식쿨 호수를 제외한 전 국토가 산악지대인 가난한 나라이다.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대라서 발전소를 지을 평평한 땅이 없다고 한다. 물론 나라에 돈이 있으면 땅을 다져서 어떻게든 발전소를 짓겠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아예 발전소가 없는 것은 아니고 수력발전소를 통해 나라에 전기가 공급되고 있다. 전기 사정이 열악하니 마음대로 펑펑 전기를 쓸 수 없다. 솔직히 충격적이었다. 카자흐스탄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하던데 그 이유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아직도 전기라는 인간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곳이 여기있다, 키르기즈스탄.
그리고 시내 쪽을 보니 생경한 광경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저기는 비슈케크의 성심당과 같은 유명 빵집인가 보다. 사람들의 줄이 길다. 그 건물에는 환전소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외국인인 우리를 보자 호객 행위를 하러 나온다. 하지만 우리에겐 키르기즈스탄 청년 Ben이 있지 않은가. Ungry한 우리 기분을 알기에 알아서 잘 뿌리친다. 그리고 상점 밖에 있는 메뉴판 가격을 본다. 내 얼굴만한 빵이 하나에 한국 돈으로 500원 정도 했다. 이 나라는 COM(솜)이란 자국 화폐를 쓰는데, 아무래도 경제 소국이기 때문에 그만큼 돈의 가치도 떨어진다. 카자흐스탄도 충분히 물가가 저렴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여기는 신세계이다. 진짜로 카자흐스탄 물가에 절반 정도 되는 것 같다. 시내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새 식당에 도착했다. 키르기즈스탄 전통 음식점이었다. 1시간 정도 걸어서 한계치까지 배가 고팠다. 금방 도착한다더니만 우리는 무려 5km를 숙소에서부터 걸어왔다. 이곳 음식 맛은 어떨지 한번 살펴보자.
(좌) 중앙아시아식 전통 빵 / (우) 키르기즈스탄식 만두 튀김
키르기즈스탄식 라그만 요리
Ben은 이곳이 비슈케크 시내에서 최고급 현지식 레스토랑이라고 했다. 지금 표현으로는 비슈케크의 이연복 셰프 레스토랑 같은 곳인 것 같다. 배고팠던 우리는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 부담스러워 일단 1인 1라그만을 주문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오기까지 허기를 달래줄 전통 빵과 현지식 만두 튀김도 시켰다. 중앙아시아에서 라그만을 먹으면 무조건 중간 이상은 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한국인 입맛에도 맞다고 생각하는데, 베트남 쌀국수 가게처럼 한국에 유행을 한 번 탔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라그만 면을 개발해서 하나 차려야겠다. 키르기즈스탄에서 먹은 첫 끼니는 상상 이상으로 맛있었다. 그동안 먹었던 라그만과 다른 신세계였다. 알마티에서 가장 유명한 라그만 식당 중에 '파라다이스'라고 있는데, 거기와 견줘도 밀리지 않는 맛이었다. 게다가 가격이 한 그릇에 3~4천 원이란 것은 보너스였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 몽골을 가면 먹고 실망하게 될 음식이 현지식 만두 요리일 것이다. 만두피와 속 재료가 따로 놀고 느끼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곳의 현지식 만두 튀김은 One More를 더 외칠 정도로 한국식 만두 튀김의 맛과 유사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고향의 맛이랄까? 시장이 반찬이라고 배고픔은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지게끔 하였다. 언젠가 비슈케크에 다시 방문하게 될 날이 온다면 반드시 다시 가서 그 맛을 느끼고 싶다.
비슈케크 최대 멀티플렉스 쇼핑몰, Bishkek Park
밤 8시가 조금 넘었지만 쇼핑몰 안은 텅텅 비어있다
비슈케크에서 친구들과 볼링 한 판을!
허기를 달랜 우리는 근처에 Bishkek Park란 현지 최대 멀티플렉스 쇼핑몰에 갔다. 그곳에서 Ben의 추천으로 다 같이 볼링 한판과 오락실에서 놀다 가기로 했다. 혈기왕성했던 우리는 매 순간이 아까웠다. 그런데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쇼핑몰에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낮에 놀다가 밤이 되니까 다 빠진 것일까? 문득 현지인들은 과연 어떤 재미로 사는지 궁금해졌다. 여가 생활이란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나마 다행히 엄격한 규율의 이슬람법을 따르고 있는 아랍권 국가와 달리 구소련의 영향을 받아 음주는 자유로운 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카자흐스탄도 마찬가지이다. 쇼핑할만한 아이템이 있는지 백화점을 곁눈질하면서 돌아다니지만 어두침침한 분위기의 백화점에서 그런 욕구는 나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얼른 볼링장까지 이동해본다.
드디어 도착한 볼링장은 완벽한 최신식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조명도 밝았다. 이 넓은 볼링장 안에 우리뿐이었다. 사실 나는 볼링을 여기서 처음 쳐봤다. 운동을 보는 것만 좋아하지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은 걷기와 등산, 그리고 천천히 오래달리기이다. 사람에게는 운동 신경이란 것이 있는데, 나는 그 신경 세포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걷기이기 때문에 여행하면서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 당시엔 남녀가 섞여서 처음 볼링을 접하는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에 재밌었다. 외국에서 볼링이라니,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그리고 원래 고수끼리 붙는 싸움보단 속어로 좁밥끼리 싸우는 게 더 재밌다고 하지 않던가? 마찬가지로 스타크래프트도 잘하는 사람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밸런스가 붕괴되기 때문에 다 못해야 한다. 돌아갈 때는 쇼핑몰 앞에서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왜 걸어왔는가. 나의 세 번째 해외여행 국가, 키르기즈스탄의 첫날밤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솔직히 첫날은 어두침침한 도시의 풍경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두운 풍경에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스케치를 하다 보니 조금씩 비슈케크란 도시가 색을 찾아가는 것 같다. 차에 오래 있어서 정말 이 나라의 맛만 봤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이식쿨 호수 투어가 시작된다. 과연 어떤 놀라운 풍경이 나를 반겨줄지 벌써 기대된다. 즐거웠던 기억을 추억하다 보면 생각나는 영화 제목이 하나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그렇다. 그 시절 우리는 모두 하나였고, 즐거웠고, 힘들어도 행복했고 웃을 수 있었다. 과연 회사를 다니며 그 조직 이 힘들어도 행복했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까? 괜히 씁쓸해지는 저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