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gni, 유라시아 여행 - 1,600m 산악도로 횡단의 기록
키르기즈스탄 2일 차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눈을 뜨려고 하니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한국식 난방, 바닥 난방이 그리워진다. 패딩 입고 이불을 덮고 잤음에도 불구하고 춥다. 아직 10월 초인데 이렇게 춥다니. 물론 해발 1,600m, 고도가 백두산 작은 봉우리 정도가 되는 것은 고려 해야겠지만. 어젯밤 볼링을 치고 돌아온 후, 미리 마트에서 샀던 술을 깔고 밤 늦게까지 술판을 벌였다. 모두 표정이 괴로워 보인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 순서대로 화장실에서 씻기로 한다. 추운 날 아침에 온기가 없는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괴로운 일이다. 심지어 수압도 약해서 머리 한 번 감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어제저녁부터 내린 비가 새벽까지 추적추적 내렸다. 다행히 준비하고 배낭을 메고 나오니 비는 그쳤으나, 숙소 앞 흙길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동할 Van까지 물 웅덩이에 신발이 젖지 않게 조심해서 이동해야 했다. 그런데, 숙소 마당에 웬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면서 재롱을 부린다. 어렸을 적 개한테 물린 기억 때문에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좋아한다), 순수한 저 눈망울이 귀엽지 아니한가. 13명의 대인원이 이동하려면 꼭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어 먼저 나온 사람은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귀염둥이 강아지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잠이 깨고 올라오는 체온에 차가운 바람은 내 컨디션에 상쾌함을 더하고, 강아지의 재롱은 내 기분을 Up시켰다. 아침 시작이 좋다. 오늘은 이식쿨 호수를 만날 수 있을까? 몇 시간이나 이동 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 Van 의자에 내 몸을 기댄다.
수도 비슈케크를 떠나 이식쿨 호수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나는 지나가는 모든 풍경 하나하나를 놓치기 싫어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수도를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비가 내린다. 비록 시간은 정오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해발 고도가 올라가면서 실외 온도는 더 떨어지고 있나 보다. 비가 눈으로 바뀐다. 그해 10월 키르기즈스탄에서 첫눈을 봤다. 그런데 눈이 너무 예쁘지 않고 사납게 내렸다. 첫 눈이 내리면 생각나는 로망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좋은 친구들과 함께 이 귀중한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좋을 뿐. 여행 기간 내내 친절했던 운전기사 아저씨, 악천후에 고생이 많으시다. 한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온 후 가장 안 좋은 날씨였다. 왜 하필 여행 기간에 이런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서 구름이 걷히고 해님이 떠오르면 좋겠다. 나는 선선한 날씨에 이식쿨 호수에서 수상 패러글라이딩할 것을 꿈꾸고 왔단 말이다.
"Where are we going, Ben?", 오늘 일정이 궁금해서 물어본다. 속으론 오늘 이식쿨 호수를 볼 수 있는 거니? 이런 의도였다. 오늘은 비슈케크에서 이식쿨 호수 북부에 있는 도시 촐폰아타(Cholpon Ata)란 곳으로 간다고 한다. 그 도시에서 루크 오르도(Rukh Ordo) 박물관이 유명한데,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일정을 변경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아마도 오늘은 박물관 입구에서 이식쿨 호수 맛보기만 하고, 근교 리조트에 가서 우리끼리 재밌게 놀아야 할 것 같다. Kyrgyz Host에서 루크 오르도 박물관까지 거리는 약 260km, 약 3시간 30분 소요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구글맵에 나왔다. 더 걸릴 것 같은데, 이 긴 시간을 어떤 사색을 하면서 보낼까?
'Mile High City'란 별칭으로 유명한 도시가 있다. 아마도 미국 프로스포츠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로키 산맥이 있는 콜로라도 주의 주도 '덴버(Denver)'이다. 높은 고도 때문에 홈런이 잘 나오고 체력 소모가 심해서 원정팀의 무덤이라 불리는 그곳. 언젠가 미대륙 횡단 열차를 타고 이 도시를 방문하고 싶다. 이곳의 고도는 해발 1,700m 정도인데, 내가 지금 있는 산악도로 위의 고도도 약 1,600m이다. 거의 비슷하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 키르기즈스탄을 'Mile High Country'라고 부르고 싶다. 국토 대부분이 천산산맥 산악지대이니까. 혹자는 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스위스에 갔던 경험이 없어서 비교 불가인 것 같다. 경남의 가지산, 간월산 등이 있는 산맥 지대를 영남 알프스라고 한다. 제2의 누구, 아시아의 나폴리 등 이런 수식어가 난 싫다. 예를 들어, 그냥 여기는 한국의 통영이고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일 뿐이다.
계속 오르막길이다. 길이 험준하다. 자연 앞에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 눈발이 사나워 차량에서 사계 확보가 어려웠다. 조금은 무서워진다. 어렸을 때 아버지 차를 타고 눈 오는 날 미시령 고개를 올라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려면 진부령, 대관령, 미시령 등 강원도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당시에는 강릉까지 직통 고속도로가 없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베테랑 운전자라고 하더라도 미시령을 오르고 내릴 때 엄청 마음 졸이면서 있었다. 표정의 변화없이 열심히 운전하는 우리 기사님. 조금 불안하지만 창문 밖에 펼쳐진 키르기즈스탄 산악 지대 모습을 감상한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 보니 온통 공사판이다. 악천후 때문에 이 공사판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것인지 광물을 캐고 있는 흔적인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드디어 고개를 넘어 이식쿨 호수 초입으로 진입했다. 조금은 낮은 지대로 내려오자 눈이 그쳤다.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도로 양옆에 있는 가로수 크기가 웅장하다. 벌써 조금씩 단풍도 들고 있다. 뭐랄까,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같은 이 도로가 호수 둘레를 감싸고 있다. 차창 너머 나무는 똑같고, 그 너머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만 바뀌고 있을 뿐. 이제 좀 속이 시원하다. 응고된 응어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된 키르기즈스탄의 자연 풍경을 느껴본다. 저 멀리 수평선이 보인다. 점점 다가간다. 이윽고 이 여행의 목적인 이식쿨 호수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중의 하나인 이식쿨 호수. 너무 커서 수평선이 보인다. 그리고 그 크기를 감히 내가 가늠하기 힘들었다. 최고 수심은 700m가 넘는다는데, 왠지 그곳에는 전설 속의 괴물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 호수에서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이곳에서 잡힌 물고기는 어떤 맛과 풍미를 갖고 있을까? 갑자기 분위기 먹방이다. 카자흐스탄에 온 후 제대로된 생선 요리를 먹어보지 못해서 너무 먹고 싶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내륙 국가에서 사는 것이 힘들었다. 호수 주변으로 양, 소, 말이 단체로 풀을 뜯어 먹고 있다. 키르기즈스탄이란 여행은 이런 목가적 풍경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유럽 건축 양식이 대단하고, 볼거리가 많아도 이상하게 종종 이런 키르기즈스탄의 목가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어디가 더 좋고 안 좋고는 의미 없는 논쟁 같다. 그냥 둘 다 각각의 매력이 있다.
몇 시간을 달렸는지 모르겠다. 촐폰아타의 루크오르도 박물관에 도착했다. 비와 눈을 그쳤지만, 날씨가 애매했다. Ben이 기사 아저씨와 무슨 얘기를 나눈다. 아무래도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일정을 조절하려는 것 같았다. 일단 모르겠고 Ben을 제외한 우리는 비슈케크를 떠나 처음으로 도착한 이식쿨 호수 인근 관광 명소이기 때문에 신나서 사진을 찍는다. 입구를 바라보면 뒤에 호수가 있고, 뒤돌아보면 만년설산이 있다. 나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알마티에도 설산이 있지만 뭔가 가깝지 않은 느낌이었다. 중앙아시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에게 말할 수 있다. 비록 땅이 넓어 여행 기간 내내 차량에서 오래 있어야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는 풍경을 보면 그런 힘듦이 싹 가실 것이라고.
예약했던 주변 리조트로 출발한다. 일단 마트에서 저녁에 먹을 주전부리를 미리 사고 들어간다. 우리의 밤은 길다. 내 기억에 예거마이스터란 술이 1L 가격이 한국 돈으로 15,000원 정도였다. Olleh!! 오늘 제대로 이식쿨 호수 못 봤어도 괜찮다.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 유토피아가 아닌가! 와인도 한 병에 3~5천 원 정도만 지불하면 괜찮은 것을 고를 수 있다. 너무 행복하다. 만약 지금 같았으면 저런 생각을 안 했을 것 같다. 휴가 기간에 일분일초가 아까운 직장인 아닌가. 솔직히 하루 날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땐 그랬다. 그저 그 시간을 채울 풍경도 좋지만, 사람이 더 좋았다. 대학교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정말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그저 사람이 좋아 같이 얘기하고 공감하는 것이 좋았었다. 그 결과 결혼식 때 내 지인으로만 50명이 넘는 사람이 직접 참석했으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싶다. 얘기가 또 삼천포로 빠졌다. 리조트에 짐을 풀고 단풍이 물든 숲길을 잠시 걸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위해 근처 현지식 맛집으로 갔다. 여기서 이식쿨 호에서 잡힌 생선을 먹었다. 꽤 기대했는데 향신료 향이 진해서 생선 고유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라그만과 함께 나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모여서 마피아 게임을 시작했다. 밤이 깊어지도록 알코올과 함께. 내일 날씨가 맑아지길 기도하면서 이식쿨 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