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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라시아 여행기 : 키르기즈스탄 편 #5

Pogni, 유라시아 여행 - 카라콜, 다시 비슈케크로

by 포그니pogni



# 카라콜, 다시 비슈케크로



미쳤다. 여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반환점을 지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일상을 벗어나' 오롯이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즐길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상을 벗어나'의 의미는 반대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면 마음이불편해 진다는 뜻이다. 그런 시점이 다가왔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제 키르지스스탄의 이식쿨 호수, 만년설산은 안녕이다. 저녁에 첫날 머물렀던 비슈케크 숙소로 다시 간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다. 분명 1.5개월 동안 카작 생활을 하면서 좋았던 것이 많았지만, 다시 돌아가려니 싫었던 기억만 떠오른다. 아마도 여행의 끝자락이 아니라고 믿고 싶기 위한 명분을 스스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닐까? 하지만 오롯이 마지막 순간을 즐길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Life Goes On' 아니 'The Travel Goes On'을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지금 이 순간 흘러가는 1초의 시간조차 아깝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우리 Van의 뒷통수다
창 밖에는 눈 쌓인 들녘에서 소들이 풀을 찾아 뜯고 있었다



내가 지금 있는 '카라콜'의 다른 이름은 러시아 탐험가 프셰발스키의 이름을 딴 '프셰발스크'이다. 오늘의 첫 방문지는 그의 흔적을 찾아 프셰발스키 박물관으로 간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프셰발스키는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전문 탐험가로서 당시 미지의 공간이었던 티베트를 탐험했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유럽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해에 크게 이바지한 사람이라고 한다. 한편 햇빛은 쨍쨍하지만 여전히 눈은 녹지 않았다. 혹독한 키르기즈스탄 겨울의 시작인 것일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중앙아시아의 겨울이 얼마나 길고 혹독한지를. 1월 어느 날에 겪었던 카자흐스탄에서 영하 30도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차창 밖에는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양, 소, 염소가 사이좋게 풀을 뜯고 있었다. 나는 잘 안 보이는데 어디 먹을게 보이는 것일까? 30분에서 1시간 사이를 달려 드디어 박물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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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프셰발스키 동상 / (우) 너는 어떻게 박물관 입구까지 왔니?
설산이 병풍처럼 보이는 박물관 내 어느 언덕
왠지 모르게 우린 뛰고 싶었다, 청춘이니까



입구 앞에는 어디서 왔는지 소들이 길목을 장악하고 있다. 도로에 풀썩 앉아 길을 막고 있는 인도 소들과 비교해보면 천사 수준으로 평화로운 아이들이었다.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아니면 배가 몹시 고픈 것인지 가까이 다가가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본다. 여기는 실내 박물관이 아니라 야외 박물관이었다. 낙엽과 눈이 쌓인 쓸쓸하지만 나름대로 낭만적인 산책로를 걷다 보니 몸에 좋은 기운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 심심했다. Ben이 여기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텐데. 계속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프셰발스키 동상을 발견했다. 러시아를 포함한 구소련 지배하에 있던 국가엔 동상이 정말 많다. 내가 느끼기에는 걷다보면 사방팔방 마주칠 수 있는 것이 동상이다. 알마티에서도 동상은 많이 봐서 큰 감흥은 없다. 모두 흩어져서 공원을 걷고 있는데, Ben이 우리를 향해 소리친다.


"Everybody come to here. And look around."


조금은 이 박물관에 대해 실망스러웠던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간다. 그곳은 전망이 탁 트인 언덕이었다. 언덕 뒤로는 웅장한 천산산맥의 설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에 감탄해 풀썩 주저앉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웅장했다. 카자흐스탄 챠른 캐년에서 봤던 대자연보다 더 거대한 대자연이랄까? 사람이 손이 닿지 않은 무위자연(無爲自然)에 나도 모르게 물아일체가 된 것 같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사진을 수십 장 찍었지만, 카메라로는 전혀 담을 수 없는 장관이다. 왜 그 옛날 선비들이 벼슬 등 부귀영화를 버리고 자연에 묻혀 살고 싶어 했는지 간접적으로 느껴본다. 'Nature is the art of God.(자연은 신의 예술품이다)'란 문구도 떠오른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Go, Choo Jam' 스냅 사진을 즉석에서 찍어본다. 눈이 덮인 설산을 배경으로 한 '점프샷'이다. 한국, 싱가포르, 키르기즈스탄, 오스트리아 뭔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4개국 남자들의 호흡은 역시나 잘 안 맞았다. "One, Two, Three!!"라는 신호를 듣고 동시에 뛴다고 뛰는데 어쩜 이렇게 안 맞을까? 여러 번 시도한 끝에 건진 사진이 바로 위 사진이다. 솔직하게 박물관 자체는 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예술 같은 자연을 보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니까 만족스러웠다. 우리끼리 추억의 스냅사진 한 장을 이렇게 남기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간다.



시내 중심이지만,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카라콜, 러시아 동방정교회 '삼위일체 성당' (Holy Trinity Cathedral)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정교회'란 단어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가 있다. 정교회란 그리스를 축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권 지역에서 발전한 그리스도교를 총칭하는 단어이다. 동쪽 방향에 있는 정교회란 뜻의 동방정교회와 동의어다. 이렇게 같은 그리스도교가 갈리게 된 것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어 비잔티움 제국을 세우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특히 그리스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러시아에서 정교회를 많이 발전시켰다. 처음에 키르기즈스탄에 러시아 동방정교회가 있다고 하길래 동방이란 단어가 동유럽이 아닌 동양에서 발전한 러시아식 그리스도교의 개념으로 받아들였었다. 그냥 쉽게 말하면 이곳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세워진 러시아식 교회인 것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질뇨니 바자르로 가는 길에 있는 판필로프 공원에도 러시아 동방정교회인 '잔코브 성당'이 있는데, 당시에는 주의 깊게 이 성당을 보지 않아서 목재로 건축된 키르기즈스탄의 이 교회가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현지 빈민들이 다가온다.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붙잡으며 돈을 달라고 구걸한다. 아마도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구걸해서 연명하는 빈민인 것 같은데, 갓난아이를 안고 돈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짠해진다. 그렇지만, 나는 돈을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게 돈을 주면 주변에 있는 다른 걸인들이 한 명씩 다가와 쟤도 줬으니 본인도 달라는 식으로 돈을 구걸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구걸이 호구지책(糊口之策)이겠지. 새삼스레 키르기즈스탄이 중앙아시아 중에서도 손꼽히는 최빈국에 가깝다는 것을 상기시켜줬다. 이곳은 지도상으로 보면 카라콜 도시 한가운데에 있다. 하지만 주변 풍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남긴 채 성당 입구로 입장한다.


러시아정교회 성당과 유럽 본토식 성당은 구분하기 쉽다. 전자를 보면 지붕이 돔(Dome) 형태로 되어 있고, 후자는 대게 첨탑으로 끝맺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첨탑 형태보다 돔 모양이 정감이 가는 것은 왜일까? 카라콜 러시아 동방정교회 성당은 목조 건물이 철로 만들어진 첨탑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인데, 나무가 쇠를 받치면서 무너지지 않게끔 설계를 어떻게 했을지 궁금해진다. 당일 성당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는 닫혀있어서 밖에서 외관만 볼 수 있었다. 성당 규모는 소박했지만, 목조 건물이 풍기는 느낌은 시베리아 벌판에 사는 러시아인의 전통 가옥 같은 느낌이랄까? 한 바퀴를 도는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기념사진을 찍고 출구로 나오기까지 30분도 안 걸렸다. 짧았지만 강렬한 인상이 남은 곳이었다. 카라콜에 가게 된다면 프셰발스키 박물관과 러시아 동방정교회는 방문해볼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서 키르기즈스탄에서 트래킹을 즐기는 것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바스쿤 협곡(Barskoon Valley)의 전경
이번 여행의 마지막 단체 사진, 그 시절 우리는 함께였다



현지식 식사를 마지막으로 카라콜을 떠난다. 다시 여행의 원점인 비슈케크로 돌아가는 것이다. 첫 스타트를 끊었을 때는 꽤 긴 여정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모든 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다. 동방정교회가 마지막 관광지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Ben이 한 지역을 더 들른다고 한다. 바스쿤 협곡(Barskoon Valley)이라는 곳인데, 여기는 키르기즈스탄으로 찾는 트래커들의 주요 트래킹 포인트라고 한다. 위치는 이식쿨 호수의 남쪽 가운데에서 산맥이 있는 방향으로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있다. 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어떤 자연의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만추가경(晩秋佳景), 늦가을의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의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프셰발스키 박물관처럼 흩뿌려진 낙엽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침엽수림 지대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산 위에 수채화 물감이 그라데이션처럼 뿌려진 것처럼 초록색과 노란색이 뒤섞인 산 중턱의 초원이 인상적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가을 기간이 아주 짧다. 그래서 10월이면 이미 우리나라의 늦가을과 같은 정취를 풍긴다. 침엽수림의 짙은 초록색과 대비되는 덜 녹은 눈과 올 한 해 수명이 다해가는 풀. 이것이다, 키르기즈스탄의 만추가경이. 시원한 계곡물 소리와 함께 말과 양이 뛰어놀고 있는 것과 같은 풍경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단체 사진을 찍었다. 4개국 청년들이 모여 떠났던 미지의 세계 키르기즈스탄 여행. 아직 비슈케크 시내 여행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는 정들었던 키르기즈스탄 자연과의 작별 인사를 각자 준비하고 있었다. 각자 컨셉을 잡고 촬영에 들어간다. 당시 나는 갤럭시 s5 폰을 쓰고 있었는데, 360도 촬영 기능을 통해 최대한 크게 우리와 풍경을 담아봤다. 다 찍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한 명이 움직였나보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Jesus 헤어스타일 친구의 머리가 잘렸다. 하필 잘려도 왜 머리가 잘린 걸까? 안타깝다. 해가 지기 전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이젠 진짜 비슈케크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아쉽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을을 배경으로 동영상을 담아본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간다면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숙소로 돌아가 저녁을 먹으면서 각자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풀어본다. 점점 밤은 깊어가는데 잠들고 싶지 않은 키르기즈스탄의 마지막 밤이다. - 끝 -



만년설이 녹아내려 흐르는 바스쿤 협곡의 계곡, 이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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