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카자흐스탄 편 #11 - 메데우 방문기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 - 공자
이젠 나이를 먹어서 직접 해봐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시기가 온 것 같다. 나에겐 특히나 스케이팅이 그렇다. 나는 대학생 때 학교 주변 저소득층 대상 공부방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이들과 스케이트장에 처음 가봤다. 어쩜 그렇게 다들 잘 타는지. 나는 걷는것 조차 힘겨웠던 기억이 있다. 다시는 스케이트는 안 타야지란 다짐을 하면서. 하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카자흐스탄에서. 터키 친구 1명과 카자흐 친구 3명, 그리고 한국인 5명의 조합으로 '메데우(Medeu)'란 스케이트장에 가게 된 것이다!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내비쳤지만, 외국인 친구들이 섭섭해 하는 표정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아니라 스케이트화를 신고 걸어 다녔지만, 해발 1,000m가 넘는 산자락에 있는 스케이트장에서의 스케이팅은 카자흐스탄이 아니면 경험해보기 힘든 아주 재밌는 경험이었다.
학교 기숙사 앞에서 오후 늦게 모였다. 11월부터는 알마티 도심에 하루가 멀다 하고 눈이 내려서 거리는 항상 눈밭이었다. 버스가 과연 미끄러운 길을 뚫고 메데우까지 잘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학교 근처에서 침볼락 스키장이 종점인 버스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10분 정도 지나니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에 한계령 고갯길과 같은 길이 나오면서 끊임없이 올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걸? 온 세상이 겨울왕국이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설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동영상이나 사진을 남겨놔야 하는데, 서서 버스를 타고 있어서 안전상의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아무튼 눈 앞에 펼쳐졌던 풍경은 알마티란 도시와 권태기를 느낄 때 즈음 찾아온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드디어 입구에 도착했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버스에서 내리자 보이는 스케이트장 주변 설경은 나를 더 황홀하게 됐다. 나는 안타깝게도 카자흐스탄에 오래 머물면서 단 한 번도 침볼락을 가지 않았다. 못 했다기보다 안 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침볼락까지 가는 교통편도 애매했거니와 스키도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좋아하지 않는 스키를 타려고 이것저것 드는 비용이 너무 아까웠다. 물론 스키 시즌이 지나고 자연경관을 보기 위해서 와도 됐었지만, 이상하게 잘 안 가졌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후회되는 선택이었는데, 그나마 침볼락 가는 길 중턱에 있는 메데우라도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천산산맥의 만년설로 둘러쌓인 도시에 와서 설산 한 번 안 가보고 돌아온다는 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 개최국, 카자흐스탄!
한국에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중계방송을 봤을 때가 생각난다. 이상하게 카자흐스탄 선수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무척 반가웠다. 그때 새삼 깨달았다. '맞다, 카자흐스탄은 동계 스포츠 강국이지?'.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이 열린 다음해,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이 대회에서 홈 어드벤티지도 있었겠지만, 무려 아시안게임 1위 국가가 카자흐스탄이었다! 한국은 3등이었는데 메달 숫자가 압도적으로 차이가 많이 났다(카자흐스탄 금메달 32개, 한국 금메달 13개). 알마티 시내 쇼핑몰마다 실내 스케이트장이 있는데, 카자흐 국민들의 스케이트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대표적인 선수로는 재작년 백주대낮에 괴한에 피습당해서 유명을 달리한 카자흐스탄 피겨 영웅 '데니스 텐'이 있다(그는 의병장 민긍호 선생의 후손으로도 유명하다). 이제 다른 얘기는 각설하고 메데우(Medeu) 스케이트장 안으로 들어가보자.
입구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경기장은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이곳은 동계 아시안게임 당시 스케이트 주 경기장이었는데, 이상화 선수 등 우리나라 빙상계 슈퍼스타들이 이곳 스케이트 경기장을 누볐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벅차올랐다. 입장료는 1,800탱게(한화 약 10,800원)다. 장비는 별도 요금이 부과됐던 것으로 기억난다. 폐장 시간은 밤 11시까지이다. 이제 스케이트화를 빌릴 차례다. 신발 끈을 꽉 묶고 발목이 안 꺾이게끔 조심해서 빙상장 입구로 들어간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다. 과장한 것 하나 없이 축구 경기장 크기와 비슷한 크기였다. 이전에 봉사활동을 하며 갔었던 고대 아이스링크장은 이곳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인 것 같았다. 갑자기 스케이트를 더 잘 타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현지인 친구 아셈(Assem)과 유마(Yuma)에게 열심히 배워봤다.
현실은 시궁창이다. 발전이 없다. 내 옆에 있는 다른 친구들이 다 도와줘도 계속 엉덩방아를 찧는다. 역시 뭐든 어렸을 때 배워야 한다. 이날부터 나는 'Mr. Sliding'이 됐다. 수영과 더불어 어렸을 때 못 배워서 아쉬운 운동이 스케이트다. 그렇지 않아도 미끄러지는 것에 대해서 겁이 많은데, 나이 먹고 해보려고 하니 도저히 될 턱이 있나....... 그래도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나만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다. 스케이트로 미끄럼을 타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스케이트 날로 바닥을 찍으면서 넘어지지 않게 걸어본다. 결국, 한 바퀴를 다 돌았다. 발목이 찢겨 나갈 것만 같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나만의 성취감은 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너무 춥다. 체감 온도 영하 20도의 추위에서 한 시간 넘게 실외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럴 때 아쉬운 것이 먹거리다. 한국이었으면 분명히 스케이트장 매점에 어묵을 파는 매장이 하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니면 뜨거운 물을 받아 꽁꽁 언 손을 녹이면서 먹는 컵라면도 생각이 난다. 이 추위에 햄버거와 피자는 좀 아닌 것 같다. 이제 슬슬 집에 갈 시간이 됐나보다.
It's time to go home.
이제는 집에 갈 시간이다. 대충 이른 저녁을 먹긴 먹었는데, 추운 야외에 있으니 배가 고파온다. 얼른 학교까지 가야 하는데 버스 배차 시간이 너무 길다. 산 중턱이라 인터넷도 안 돼서 구글맵으로 버스가 언제 올지도 모르고 기다리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겨울 추위는 매섭다. 물론 현지 친구들은 알마티는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따뜻한 도시 중에 하나라면서 씩~ 웃는다. 들어보니 어떤 내륙 지방은 한겨울에 영하 40도 밑으로 내려가는 곳도 있어서 만약 노상방뇨를 하면 그대로 물줄기가 얼음이 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설(說)도 있었다. 그래도 영하 20도는 너무 가혹하다, 가혹해.
기숙사에 돌아가도 먹을 게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다행히 학교 건너편 단골 케밥집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다. 가끔씩 이곳에서 먹었던 케밥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한국에선 절대 따라올 수 없는 특유의 향이 있다. 부산역 차이나타운 거리에 있는 러시아 음식점에서도 먹어봤지만, 그 맛이 아니었다. 나는 케밥을 주문할 때 십중팔구로 닭고기 케밥을 주문했다. 한국에서야 소고기가 귀하지만 여기선 흔하디 흔한 것도 있고, 이상하게 소고기 맛이 없다. 차라리 닭이나 오리가 훨씬 맛있었다. 같은 소고기인데 왜일까? 아무튼 이날은 맥주도 안 시키고 케밥만 우걱우걱 먹었는데 역시 시장이 반찬이라고 운동 후에 먹는 음식은 뭘 먹어도 맛있다. 이렇게 짧았지만 긴 하루가 지나갔다. 이제 학기도 마무리 되어가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 일자도 다가오고 있다. 당시엔 권태기가 와서 이 도시가 너무 싫었다. 그렇지만 따뜻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돌이켜보면 모든 기억이 재밌고 따뜻한 추억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