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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Dec 12. 2020

런던, 템즈강에 흘려보낸 것들에 대하여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영국, 런던 편 #3


런던의 차이나타운(China Town) 거리



  럭셔리 시계 매장에 들렀다가 오후부터 무엇을 런던에서 했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기억이 없다. 그냥 하염없이 걸었다. 나에게 런던에서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고 풍경을 머릿속으로 욱여넣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벼락치기 공부를 하면 금방 외웠던 것이 하루 이틀만 지나도 사라지듯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 이날 오후의 기억은 증발해버린 것 같다. 그래도 조각난 기억을 디스크 조각 모음을 하듯이 복원을 해보자면, 점심에는 런던 한식당에서 종민이의 지인과 함께 식사를 했었다. 그리고 다시 피키딜리 서커스 주변 쇼핑거리를 들어가 끊임없이 아이쇼핑을 했다. 특히 런던에 NIKE Town이라고 건물 전체가 나이키 매장인 곳 있었는데, 종민이는 그곳에서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조던 신발을 여러 켤레 구매했었다. 후문에는 당시에 런던에서 샀던 신발을 한국에서 중고나라에 판매를 하니 비행기 티켓값 상당 부분을 메꿀 수 있었다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런던의 트라팔가(Trafalgar) 광장
트라팔가 광장 남쪽에서는 랜드마크 빅벤이 보인다.



하나, 둘, 셋 발걸음에 맞춰 거리를 걷다 보면♬
- 윤건, '걷다'中에서



  그리고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났었던 런던의 차이나타운에 갔다가 그 유명한 트라팔가(Trafalgar) 광장에 왔다. 신항로 개척 이후 대항해시대 최강 국가였던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넬슨 제독의 영국 함대에 무너져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서막을 알렸던 그 전투. 이곳은 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광장이다. 물론 미술에는 관심이 없어서 들어가진 않았지만, 중심에는 영국 내셔널 갤러리가 있었다. 그리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초대형 크리스마스트리 하나가 있어서 연말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대형 트리에는 비밀이 있다. 트리는 매년 노르웨이에서 들어와 12월 5일이면 점등식을 한다. 노르웨이에서 마치 조공품을 보내듯이 보내는 사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승전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렇게 박싱데이에 맞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하나의 행운이 아닌가 생각한다.


  트라팔가 광장 남쪽으로 오자, 저 멀리 런던의 랜드마크 빅벤(Big Ben) 시계탑이 보인다. 에펠탑과 마찬가지로 책에서만 보던 랜드마크의 실루엣이 멀리서 보였을 때의 설렘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벅찬 감동이었다.  여기서 빅벤이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는 도보로 10~15분 남짓. 하루 종일 걸었던 거리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번만큼은 가는 길에 발걸음을 급하게 재촉하진 않았다. 느리게 안단테(Andante)의 마음 가짐으로 런던의 밤에 한껏 취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2층 버스 조명의 채도가 더욱 짙어지고, 유럽 특유의 황금빛 조명의 밝기도 더 빛나 보인다. 당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보려고 타이트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거시적으로 프레임만 잡아놓고 조금 느리더라도 여유를 가지면서 돌아다니자고.



영국의 랜드마크, 웨스트 민스터(Westminster) 사원 & 빅벤 (Big Ben)



# 템즈강에 흘려보낸 것들


대면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바뀔 수는 없지만, 맞서 대면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빅벤은 상상 그 이상의 랜드마크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런던에 있는 것이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영국에 오기 전에 배네딕트가 나오는 '셜록' 드라마 시리즈를 열심히 봤는데, 드라마에 나온 런던 도심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빅벤 앞이 더 드라마 같았다. 저 건물이 뭐라고 사람들이 많을까 생각했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단, 관광객 '등'에 빨대를 꽂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모기들이 맴도는 것만 빼면 말이다. 동양인이라 더욱 만만한지 어떻게든 1파운드라도 현찰을 빼먹으려고 했던 그 의지에는 박수를 보낸다. 물론 나는 종민이 덕분에 돈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주변을 잠시 보고 있노라면,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들에게 돈을 건네는 동양인들이 꽤 보였다. 유럽에 가서 거기에 있는 백인들이 한없이 신사답고 친절할 것 같다면 절대 아니다. 그들도 어찌 보면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하류 계층의 사람일 뿐. 그리고 유럽 어디서나 돌아다니면서 항상 소매치기 조심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다. 나는 영국 여행 준비를 하면서 템즈강에서 '나'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알마티 기숙사에서 짐을 챙길 때, 강에 흘려보낼 것들을 챙겨 왔다. 가령, 前 여자 친구의 편지와 물품과 닳고 닳아서 더 이상 쓰지 못할 만큼 해진 조그마한 물품, 회계사 준비를 하면서 필기했던 일부 과목 얇은 노트까지. 객관적으로 보면 '쓰레기 투기'라고 보이겠지만, 나에게는 나름대로 성스러운 이벤트이자 행위였다. 왠지 지구 반대편 영국의 템즈강에 흘려보내면 이것이 북해로 흐르고 북극으로 도달해 영영 생각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과거를 잘 잊지 못한다. 그것들이 잠이 들기 직전에 항상 내 머리맡에 다가와 자주 괴롭히곤 했다. 타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괴롭히는 횟수는 더욱 잦아졌다. 이렇게 흘려보낸다고 모든 것이 바뀔 수는 없겠지만, 다리를 건너 조금 한적한 곳에서 하나씩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실패한 사랑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지금 실패한 시험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지금 과거 '실패'한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렇게 가져온 모든 것을 흘려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26살에 중2병이 걸려서 미친 짓을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렇게 하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고 완벽하게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템즈강에 모든 것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이후로 이것이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흘려보낸 것들은 그렇게 생각나지 않았다. 잊히지 않는 것이 있을 때는 이렇게 어딘가에 흘려보내는 등의 행위를 통해 아예 물품을 없애버리는 것이 효과가 있음은 분명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다행스럽게도 이스탄불 사비하 공항에 버리고 왔던 K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는 어느 지하철역에서 만나서 런던 시내의 Pub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수제버거라고 하지만 감자튀김도 몇 개 없는데 8 파운드 정도를 해서 새삼 비싼 영국 물가를 체감할 수 있었다. 거기에 맥주까지 마셨는데, 이거는 '유레카'였다. 사람들이 왜 유럽에 가면 맥주를 계속 마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탄산과 맥주의 향기, 이걸로 하루 마무리하는 것이 썩 나쁘진 않았다. 이제 다음날은 기다리던 쇼핑데이다. 평생 해본 적이 없었던 Flex를 하는 날. 그렇게 Flex만 생각하며 좁은 호스텔 싱글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런던 어느 Pub에서 먹었던 수제버거와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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