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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Dec 15. 2020

내 인생 첫 Flex : 박싱데이 in London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영국, 런던 편 #4

이게 바로 진짜 영국식 아침식사(English Breakfast), 무려 2만 원이 넘는 가격이다



FLEX : 과시하다 / 뽐내다


사전적으로는 ‘구부리다’, ‘몸을 풀다’라는 뜻이지만, 1990년대 미국 힙합 문화에서 래퍼들이 부나 귀중품을 뽐내는 모습에서 유래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부나 귀중품을) 과시하다, 뽐내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 출처 : 네이버 시사 상식사전


  영국 여행의 두 번째 아침, FLEX Day가 밝았다. 오늘의 일정은 아래와 같다.


노팅힐(Notting Hill) - 캠든 락(Camden Lock) 마켓 - 쇼핑 그리고 또 쇼핑 - 벨기에, 브뤼셀 이동


  오전에는 노팅힐과 캠든 락 마켓을 오후에는 쇼핑하다가 와플의 나라 벨기에로 넘어간다. 오전 일정은 다음 글에서 소개하는 것으로 하고, 초점을 FLEX에 맞춰서 오늘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려고 한다. FLEX Day 답게 아침 식사도 나름대로 럭셔리하게 먹었다. 빅토리아역 근처의 영국식 아침 식사 맛집에서 English Breakfast를 먹으러 갔다. 한국에서도 브런치를 먹어본 적이 없는데, 문자 그대로 놀랄 '노'자였다. 가격은 18 파운드 정도. 한화로 환산하면 2만 원이 훌쩍 넘어가는 가격. 그래도 어제 부실하게 먹었으니, 한 끼 정도는 먹는 것에 이 정도 투자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베이컨, 소시지, 계란 프라이 등등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그런데, 의외로 내 입맛을 사로잡은 것이 '통조림 콩'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는데, 달짝지근하니 애피타이저 느낌이 나면서 포만감도 채워주는 식자재였다. 피시 앤 칩스로 대표되는 영국 음식은 맛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날의 조식만큼은 그 어떤 미슐랭 스타 맛집보다 더 맛있었다. 그럼 이제 FLEX를 하러 가볼까?



유럽여행 출발 1일 전, 부주의로 인해 노트북님이 사망하셨다.
런던의 어느 전자상가 거리 (출처 : thecomputerrepairservices.wordpress.com)



Round 1 : 노트북



  유럽 여행 출발하기 하루 전날 밤, 기숙사에서 노트북님께서 사망하셨다. 긴 겨울 하릴없이 멍 때리고 있어야 했을 기숙사 안에서 스타크래프트로 나의 심심함을 달래주고, 나의 모든 대학생 시절 과제가 저장되어 있는 그분이 사망하셨다. 사망 사유는 이러했다. 출국일만 기다리고 있던 전날 밤에 심심함을 달래려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이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 일정 최종 점검을 하기 위해 잠시 노트북을 닫았다가 방으로 돌아왔는데, 액정이 복구되기 어려울 정도로 깨져있었다. 키보드와 액정 사이에 이어폰을 두고, 이를 인지한 지 못한 채 내려 찍었더니 발생한 대참사였다. 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장난치다가 핸드폰 카메라 렌즈도 깨 먹었는데, 완전 액정 브레이커가 됐다. 답이 없었다. 노트북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노트북이 망가져서 멘붕이 됐던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데이터가 여기에 있는데, 망가지는 순간 머리 위에 말풍선이 백지가 되는 느낌. 그렇지만, 이렇게 멍청하게 잘 쓰고 있다가 액정이 망가져봤던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종민이 말에 따르면 박싱데이 버프를 받아 전자제품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년 동안 K-SURE(한국무역보험공사) 카자흐스탄 사무소 인턴쉽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노트북을 구매해야만 했다. 그렇게 종민이를 따라서 런던의 어느 전자상가 거리로 향했다. 그리고 들어간 어느 매장. 거기서 한화 30만 원 정도에 보급형 ASUS 노트북을 구입(당시 한국에서 인터넷 구매가는 약 45만 원 정도) 했다. 이때 구매해서 3년 이상을 썼으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밥값은 하지 않았나 싶다. 이것을 사는 시간은 단 15분이면 족했다. 이때부터였다, 단시간에 내 지갑이 봇물처럼 열리기 시작한 것이. 그런데, 카자흐스탄에 돌아와 보니 문제가 있었다. 충전기가 110V 짜리여서 카자흐스탄에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멀티 어댑터를 이용해서 사용하면 계속해서 코드가 빠지는 것이 문제였다. 역시나 어쩔 수없이 SULPAK이란 카자흐스탄의 하이마트와 같은 매장에 들어가서 220V용 다용도 노트북 충전기를 샀는데, 가격이 무려 10만 원. 그렇다, 영국까지 가서 노트북을 사서 이를 여행 캐리어에 넣어 방방곡곡 돌아다닌 의미가 없었다.





Round 2 : 부모님을 위한 명품 지갑



  생각해보니 20대 중반이 다 되어 가도록 부모님께 제대로 선물다운 선물을 사드린 적이 없었다. 물론 대학생이고,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해서 벌었던 돈은 내 생활비를 채우기에도 버거웠라고 변명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돈을 아끼고, 교환학생을 생활을 하며 과외도 하며 차곡차곡 명품을 선물해 드리기 위한 돈을 저축했다. 그리고 GUCCI 매장에 들어갔다. 명품 매장도 태어나서 처음 들어가 본다. 


  나 : I want to find popular wallet, both male and female.

  직원 : (나에게 남녀 각각 세 가지 정도 디자인을 보여준다.)

  나 : This and this, finish.

  직원 :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결제를 시작한다.)


  그렇게 5분 만에 선택이 끝났고, 내 카드에서는 70만 원 정도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노트북까지 100만 원. 상점에서 도합 20분 만에 이만큼의 돈을 소비했다. 내 인생에서 하루에 이렇게 많은 돈을 써봤던 적이 없어서 그런가 가슴이 계속 콩닥거렸다. 그리고 허무했다. 돈이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도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을 생각하니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부모님은 선물을 좋아하셨지만, 어찌나 아까워하시던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지갑 하나에 90만 원에 판매되는 것을 두 개를 저 가격에 샀으니 뿌듯했다. 게다가 영국은 부가가치세율이 내가 알기로 거의 20%에 가까워서 Tax Free 혜택을 받으면 환급되는 돈이 상당히 쏠쏠하다. 이것을 대행해주는 업체에 수수료를 주고도 10만 원 가까이 금액이 환급됐다. 영국에 가면 무조건 Tax Free 혜택은 꼭 받도록 하자. 그리고 매장을 나가려는데 직원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직원 : You are great 'Rich Rich Chinese!'. Thank you! 

  나 : ....................................................



  그렇게 순식간에 매장에서 나오고 잊고 있던 친구, 이스탄불에 버려졌다가 히드로 공항으로 짐을 찾으러 갔던 K군과 접촉하기 위해 피카딜리 서커스 부근으로 이동한다.





Round 3 : 바버(Barbour)가 뭔데?



  이스탄불에서 갓 도착한 캐리어를 런던 시내 한복판까지 온 K군. 그가 런던에 와서 했던 것이라곤 전날 저녁에 PUB에서 같이 맥주를 마신 것과 다시 히드로 공항으로 돌아가 캐리어를 찾아오는 일만 했다. 그는 런던에 있었지만 런던에 없었던 사나이였다. 그런 그에게 유럽 여행을 오기 전부터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있었으니, 그것은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바버(Barbour)'란 매장에서 방수 재킷을 사는 것이었다. 비록 K군이 예상 시간보다 훨씬 늦게 와서 시간은 촉박했지만, 우리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은 바버 브랜드 매장. 박싱데이 기간 동안 저녁 6시가 되면 웬만한 상점은 문을 닫으니 30분 안에 결판을 낼 것을 약속하면서 말이다.  영국이 본고장이라서 그런지 무척이나 종류가 많아 보인다. 옷의 겉면에 기름칠이 되어 있어 비가 와도 물이 옷에 스며들지 않고 그대로 기름의 성질을 이용해서 아래로 흘려보내는 원리라고 한다.


  째깍째깍 시간은 흘러가 30분이 훌쩍 지났다. 영국 왕실에서 애용하는 홍차 브랜드 매장과 폴 스미스 매장을 가야 하는데, K군은 시간 개념 없이 옷을 계속 갈아입어본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갔고 그제야 그는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재킷 두 벌을 사는데 썼다. 내가 봤을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도대체 바버가 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폴 스미스 매장은 6시에 문을 닫는다. 그리고 20분이 남았고, 구글맵 상으로는 23분이 걸린다. 폭풍 Run을 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K군은 캐리어와 비싼 재킷을 들고 따라오고 있지만, 우리의 속도를 쫓지 못해서 질척인다. 그의 짐을 나눠 들고서라도 시간 내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58분. 아직 매장 문이 닫지 않아서 들어가려고 했지만, 6시에 문을 닫아야 하니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매정한 매장의 직원. 겨울날에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30분 안에 쇼핑을 끝냈으면 모두가 Happy Ending이었을 텐데, 도대체 바버가 뭐라고. 허탈함은 분노로 바뀌어 K군을 힐난한다. 연쇄적으로 홍차 매장도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렇게 거리에서 버린 시간 때문에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이름 모를 공원 벤치에 앉아 Take-Out 음식으로 허기를 달랬다. 이보다 처량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때도 몰랐다. K군과 붙어 다니면 발생하는 연쇄 불운 사건의 시작이란 것을. 나의 첫 유럽 여행의 K군 불운의 망령과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첫 Flex Day가 끝났다. 필요한 것과 부모님 선물을 샀지만, 정작 나를 위한 선물은 망할 바버 때문에 살 수 없었던 날. 쇼핑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바쁘게 런던 시내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거의 수박 겉핥기 여행 일정의 끝판왕이었다. 그 복잡한 길을 종민이는 어떻게 구글맵 하나만을 들고 잘 돌아다니는지 대단했다. 그렇게 런던 일정을 마감하고 벨기에를 가기 위해 빅토리아역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시간을 다시 Rewind 해서 아침으로 돌아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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