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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Dec 26. 2020

해저터널을 건너 브뤼셀로(I'm from 카자흐스탄!)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영국, 런던 편 #6

런던, 대영 박물관의 정문 입구
(좌) 노팅힐 영화의 그 장소, 리츠 호텔 / (우) 버킹엄 궁전



지금은 런던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중입니다.



  K모군 때문에 런던 Flex 일정이 꼬여버렸다. 원래는 여유롭게 쇼핑을 마치고 마무리는 영국 피쉬 앤 칩스로 끝내려고 했는데 말이다. 구매하려고 계획했던 Item Shop이 혹시 열었을까 희망을 가지고 갔지만,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덕분에 저녁을 식당에서 제대로 먹을 시간조차 없어져 버렸다. 난감했다, 아직 보지 못한 랜드마크도 많은데 어찌해야 하나. 오늘 저녁에는 Victoria Coach Station으로 이동해서 야간 버스를 타고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까지 가야 한다. 남은 시간을 보고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숙소에 짐이 있어서 걸어가야 하니까 걸어서 보지 못한 런던의 유명 건축물을 보면서 가자고. 위 인용구와 같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초스피드로 런던을 걸어서 맛만 보자는 의미였다. 별 수 없었다, 여기서 K군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랜드마크는 타워 브릿지(Tower Bridge)다. 다른 사람들 SNS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면 참 멋지던데, 가장 아쉬웠다.


  미친 듯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런던에 살았던 종민이가 지나가는 건물을 보면서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엘리자베스 여왕이 살고 있는 버킹엄 궁전이 나타났다.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이것은 왕실 건물이라서 그나마 기억에 남아있는 것 같다.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정처 없이 걸어가는 길에 빅토리아역에서 먹었던 한식 + 일식 테이크아웃 전문점 '와사비(Wasabi)'가 눈앞에 보였다. 거기서 포장을 하고 어느 공원 벤치 앞에 앉았다. 영국에서 마지막 저녁식사가 노상에서 포장 음식을 먹는 것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결말이었다. 밥을 먹는데 옆에서 K군을 엄청 갈구기 시작했다. 그의 부주의와 시간 개념 없는 쇼핑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K군의 저주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와 함께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네덜란드 일정 내내 마치 불운의 신이 우리 꽁무니를 따라다는 것만 같았다. 이스탄불에서 환승을 잘못한 원죄로 히드로 공항에서 캐리어를 받아 들고 와서 그걸 들고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는 그가 조금 불쌍해 보이기는 했다.



유럽 여행에서 애용했던 가성비 좋은 Megabus (출처 : uk.megabus.com)
Megabus를 탔던 Victoria Coach Station, 빅토리아 열차 역과는 다르다 (출처 : www.mcloughlin-gh.co.uk)



  대개 유럽 여행을 오면 유레일 패스를 이용하여 유로스타를 많이 이용한다. 하지만 유럽에 오기 전에 가격적인 측면에서 검토해봤을 때, 거의 30일에 가까운 기간 동안 유럽 대륙을 돌아다닐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느껴졌다. 그리하여 룩셈부르크에서 파리까지 갈 때 테제베(TGV) 고속열차를 이용했던 것을 제외하면 영국의 메가버스(Megabus)를 이용했다. 특히 야간 시간에 이동하면 숙박비도 1박 줄어들고, 버스 가격도 더 저렴한 이점이 있었다. 물론 그건 젊었을 때나 가능했던 것 같다. 지금은 적당히 쉬어야 여행도 가능한 나이가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메가버스를 예매할 때, 운이 좋으면 단돈 1 파운드에 이동할 수 있다. 나는 브뤼셀 - 룩셈부르크 구간에서 1 파운드를 주고 이동했다.


가장 쓸모없이 허비한 날은 웃음 없이 보낸 날이다.
- E.E 커밍스 (미국의 시인)


  저녁 9시, 브뤼셀 行 메가버스 출발 시간이다. 저녁 8시 즈음 숙소에 도착해서 캐리어를 찾고 미친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유럽의 길은 바닥의 돌이 울퉁불퉁하게 있어서 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니기에 최악의 환경이다.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끌고 다니다간 캐리어 바퀴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K군의 캐리어가 그렇게 됐다. 이렇게 되면 캐리어 안에 무거운 짐을 사실상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행 기간 내내 들고 다녀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정말 불운의 아이콘이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웃었으니 커밍스라는 미국 시인의 말처럼 쓸모없이 하루를 허비하지는 않은 것이겠지.


  겨울이지만 온몸에 땀이 범벅된 채로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겉옷으로 입은 패딩 점퍼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몸 안의 열이 폭발했다. 거의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했다. 터미널 안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수없이 많은 여행객과 다른 도시로 이동하려는 영국 현지인이 뒤섞인 저녁 9시 터미널은 마치 TV로 보던 난민촌을 방불캐했다. 숙소에서 여기까지 뛰어오면서 혹시나 버스를 놓치면 어쩌지란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었는데, 별 특이사항 없이 버스 안에 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버스 좌석이 아늑할 수가 있나. 버스에 시동이 걸리는 것을 듣고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영국 - 프랑스 間 도버 해협을 지나는 해저터널 Euro Tunnel (출처 : www.independent.co.uk)



  유럽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 도버 해협을 지나가는 해저터널의 풍경이 어떨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버스 차창밖으로 물고기 떼가 지나가는 풍경은 마치 몰디브에 있는 어느 유명한 수중 호텔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와 같은 기적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쨌든 버스는 런던을 떠나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해저터널로 들어가기 전에 잠시 정차를 하고 있었다.



I'm from Kazakhstan! That's OK.



  버스를 탑승하기 전에 달아올랐던 체열은 버스가 출발하고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더웠는지 버스 안에서 패딩을 벗고, 맨투맨 티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흰색 반팔티만 입고 해저터널까지 갔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K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태우지 못했던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 도버 해협 앞에서 한겨울에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반팔을 입고 서있는 그 순간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당시에 태우고 있던 담배 역시도 꿀맛이었다. 옆에 있던 백인 한 명이 나에게 춥지 않냐고 물었는데, 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와서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담뱃불을 끄고 버스로 들어왔다.


  나를 보더니 종민이와 K군이 키득키득 웃는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게 춥지 않냐고 물어봤던 백인이 버스로 먼저 들어와서 밖에 Crazy Asian이 있다면서, 이렇게 추운데 자기는 카자흐스탄에서 와서 하나도 안 춥다고 반팔을 입고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내가 Really Crazy Asian이라면서 말이다. 평범한 것을 싫어하는 나이기 때문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했다, '역시 나는 국제적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고 비범한 사람이군' 이라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도 보통 멘탈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버스는 달리고 달려 프랑스 영토를 지나 벨기에 국경으로 진입하여 새벽 4시 전후로 브뤼셀에 도착했다. 참, 그리고 해저터널의 물고기 뷰 따위는 없었다. 그냥 버스는 가만히 있고 터널이 캡슐처럼 이동하는 것 같았다. 혹시 해저터널을 한 번도 지나가 보지 않았다면 이런 상상은 깨고 가기를 말씀드린다. 이제 숙소만 찾아 나서면 된다. 내가 예약했던 사이트에 나와 있는 숙소 주소를 치니 버스 정류장에서 대략 20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는 걸로 나왔다. 하지만 K군의 저주는 이제 시작이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의 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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