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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pogni Dec 31. 2020

그래서 숙소가 어딘데?? : 브뤼셀 어느 새벽 거리에서

Pongi, 유라시아 여행기 : 벨기에, 브뤼셀 편 #1

벨기에 왕궁 앞 거리, 유달리 추웠던 브뤼셀의 새벽 거리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영토를 지나 벨기에에 진입했다. 사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서 밤 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숙소에 도착해도 바로 체크인을 할 수는 없었다. 유난히 힘들었던 영국 여행 막판의 여독으로 인해 버스에서 글자 그대로 '꿀잠'을 잤다. 그렇게 새벽 4시 무렵에 브뤼셀 중심부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브뤼셀 숙소를 나는 호텔스닷컴에서 예약했고, 같이 온 종민이는 아고다에서 예약했다. 그런데, 분명히 같은 숙소명으로 예약을 했는데 사이트에 표기된 숙소 주소가 다른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한국인은 우리 3명뿐인데,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의견이 분분해졌다. 결국엔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웠던 내가 예약한 호텔스닷컴 주소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걸어서 약 20분, 실패했을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고 따뜻한 실내에서 쉬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청춘은 여행이다.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내리꽂은 채 그저 길을 떠나도 좋은 것이다.
- 체 게바라(Che Guevara)


  몸이 상당히 무거웠다. 젊은 패기와 체력을 믿고 이렇게 무리하게 숙박 일정을 잡았던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깨달았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체크인 시작 시간 이후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짜서 바로 쉴 수 있는 숙소의 중요성을. 브뤼셀의 새벽은 유달리 춥게 느껴졌다. 그래도 대륙 국가라는 것인가? 런던에 새벽 비행기로 도착했을 때는 비바람이 불어 추웠던 것이지 공기 자체가 차갑진 않았다. 하지만 브뤼셀은 공기 자체가 너무 차가웠다. 게다가 갑자기 소낙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마치 혹한기 고난의 행군을 하는 마냥 여행이 노동이 되는 순간이었다. 문제는 계속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이 나타났다는 것. 겨울 새벽에 캐리어를 끌고 올라가는 행위는 정말 고통스러웠다. 짧은 시간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은 여행인가? 아니면 노동인가? 혁명가 체 게바라는 이런 순간이 찾아와도 고통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며 승화시켰겠지? 아직 나는 그런 경지까지 오르지 못한 평범한 소시민인가 보다.



아무도 없는 딱 이런 거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출처 : marie-jo-lafontaine.com)



그런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벽 어느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구글맵에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표시가 나왔다. 분명히 맞게 찾아왔는데, 호스텔 명판이 없다. 그냥 빈 일반 건물 같다. 혹시 구글에서 잘못 표기했을까 싶어서 골목에 있는 건물 하나하나를 샅샅이 살펴봤다. 그런데, 없었다. '모 아니면 도'가 나오는 상황에서 '도'도 아닌 '빽도'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정말로 이스탄불에서부터 시작됐던 K군의 저주가 내 뒤꽁무니를 쫓아서 따라다니는 기분이다. 망연자실한 순간에 이 새벽에 어느 벨기에 현지인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스타크래프트 광팬이라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의 사정을 A부터 Z까지 다 들어주고 최대한 도움을 주려고 하는 액션을 취했다. 그 새벽에 What's App으로 지인에게도 메시지를 보내서 물어봐주고 새삼 고마웠다. 한국에서 새벽에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느 외국인이 갑자기 이런 도움을 요청한다면 제대로 도와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잠시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정적이 흐르고, 종민이가 아고다에서 예약한 호스텔 주소가 맞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우겼으니 내가 욕을 먹어야 마땅하지만, 왠지 저주 때문인 것 같다면서 모든 화살이 K군에게 돌아갔다. Barbour 매장에서 시간을 오래 끌어 나와 종민이의 쇼핑을 망친 탓에 그는 붙어 다니는 여행 기간 내내 우리의 욕받이가 됐다. 버스 정류장이 가운데라고 보면 이곳은 북쪽에 있었으며, 진짜 숙소는 반대편 끝에 있었다. 다시 내비게이션으로 경로를 추적하니, 걸어서 50분이 나온다. 미쳤다. 지금도 거의 한 시간째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덜덜 떨고 있는데 어떻게 50분을 더 걸어간다는 것인가? 지나가는 행인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대로변으로 가서 택시를 잡아보기로 결정했다. 이 새벽에 과연 택시는 잡힐 것인가? 택시가 없어서 그냥 걸어가는 것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은 아닐까?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이런 시련은 다 이유가 있어서 겪는 것이겠죠?



  그렇게 고생하면서 올라온 오르막길은 다시 내려갔다. 그나마 그곳이 대로변도 넓고 센터 지역에 있는 것 같았다. 새벽에 지치지도 않는지 나는 내려가는 내내 투덜거렸다. 입이라도 중얼거리지 않으면 정말 입까지 얼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우리는 대로변 모퉁이에서 각자 위치를 잡으며 택시를 열심히 잡기 시작했다. 그때는 '우버(Uber)' 택시 어플도 없었던 시절이라 그냥 택시가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첫 택시가 K군 앞으로 지나간다. Ah... 사람이 타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택시는 K군이 손을 흔들었지만 그냥 지나간다. 저주 때문이라며 위치를 바꿨는데, 다시 택시가 자리를 바꾼 K군 방향으로 그냥 지나간다. 세 번째 택시가 지나간 이후부터 다시 K군은 우리의 욕받이가 됐다. 도대체 눈 뜨고 택시를 그냥 보낸 것이 몇 대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열 번째 즈음됐을까? 새벽 4시에 도착해서 새벽 5시 30분이 넘기고서야 겨우 택시를 잡고 진짜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용기 있게 행동하라. 불운하다면 불행에 맞서라.
- 사막의 여우 前 독일 군인, 롬멜 (Rommel)



  이런 상황에서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독일 나치 친위대 출신, 사막의 여우라고 불렸던 롬멜의 격언이 떠올랐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운해서 불행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택시를 잡고 좌석에 앉았을 때의 기분이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서 자연스레 미터기를 쳐다보게 됐다. 무슨 1초에 0.1 유로 센트씩 금액이 올라간다. 유럽의 택시 금액이 비싸다고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겪어보니까 감동은 사라지고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만이 생겼다. 언제 도착할까? 그래도 새벽이라서 교통체증도 없어 금방 도착했다. 그렇지만 택시비는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30유로 가까이 나왔다. 그래도 제대로 도착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해서 들어간 호스텔 리셉션 안은 따뜻했다. 역시나 고생 끝에 무언가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것에 대해서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혹시나 얼리 체크인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역시나 Not Available이란 답변이다. 하루 종일 흘린 땀으로 인하여 몸에서는 쩐내가 난다. 캐리어를 리셉션에서 다 펼치고서 옷을 가져가 비좁은 화장실에서 갈아입기도 좀 그랬다. 일단은 콘센트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핸드폰가 카메라를 충전시킨다.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야간 버스를 이용하면 이렇게 전자제품 충전하는 것도 일이다. 아침 8시 정도까지 버텨보고 짐을 리셉션에 맡기고 브뤼셀의 중심 그랑플라스를 시작으로 체크인 시간까지 강행군을 시작하기로 한다. 아참! 이곳에서 카자흐스탄 KIMEP 대학교 교환학생 동료인 가영이가 오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바로 룩셈부르크로 이동하는 일정인데, 어떤 일이 발생할지 가늠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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