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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시옷 Dec 08. 2024

엄마 병원비는 내가 내고 싶었다.

나의 감정과 욕구 인정하기

퇴근하기 전까지 엄마가 전화하는 일이 잘 없는데 무슨 일인지 엄마가 전화를 했다.  당신이 지금  응급실에 있으니 아이들 하원할 즈음 집에 올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조퇴를 썼다.

전화로 잠깐 듣기로는 며칠째 가슴 가운데가 아팠는데 오늘따라 아픈 부위가 넓게 느껴져서 아이들 등원시킨 뒤 혼자 병원에 갔다고 했다. 집 근처에 대학병원이 있지만, 초진은커녕 재진도 어려운 요즘인지라 바로 응급실로 왔다고 했다.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아 한결 불안을 덜었지만, 학교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다.

남편도 조퇴를 냈다. 월급은 박해도 다른 직업에 비해 유연한 근무시간이 이 직업의 장점 아니던가. 남편은 하원할 아이들을 챙기러, 나는 엄마의 상태를 알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눕지 앉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검사 결과를 말해주러 의사가 올 거라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너는 굳이 왜 왔느냐고, 집에 가 있으라 했다. 그리고

한 명만 오면 되지, 뭘 둘(남편과 나) 다 와.
내가 아픈 거 핑계 대고 둘이 좋다고 왔네.


했다. 걱정돼서 온 딸에게 이런 농담을 할 정도라면 확실히 괜찮은 것 같았다. 평소의 엄마였다.

아이 봐주느라 당신 아픈 곳은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고생하면서, 오히려 아픈 몸이 자식의 생업에 지장을 줄까 걱정하는 마음. 미안하다는 말이 싫으면 아무 말 안 해도 괜찮은데 엄마는 꼭 걱정하는 딸의 마음을 까내리곤 한다.

엄마 성격도, 고집도 다 아는 나는

의사 오면 결과만 듣고 갈게


하고 말했다.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아주 피곤한 기색을 하고도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는 의사였다.

엑스레이, 혈액검사, 심전도 검사상으로 이상 증세가 없그래도 혹시 통증이 계속된다면 심장 내과가 있는 곳으로 서 정 검사를 받아보라는 게 요지였다.

의사가 간 뒤, 엄마는 나에게 '알아서 갈 테니. 먼저 가라'라고 했다. 그리고 병원비는 얼마가 낼 테니 절대 네가 계산하지 말라고도 했다.

왜 엄마.
내가 내면 되지, 얼마 나온다고.
괜찮아.


실은 나도 병원비 내려고 간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엄마는 임금 노동 대신 돌봄 노동을 수행 중이며 전적으로 내가 드리는 생활비에 의지하신다.

월급이 아니라, 생활비다. 월급 명목으로 드린 돈이지만 결국 우리 집 먹거리에 그 돈이 다시 쓰이니 월급이랄 수 없다. 얼마 안 되는 생활비는 아마도 영양제 하나 맘 편히 사 먹기도 넉넉지 않을 정돈데, 병원비는 당연히 내가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원비를 내가 내겠다는 말, 아니 나의 마음은 '짜증 나게 하지 말라'는 히스테릭한 반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에도 내가 병원비를 냈던 게 정말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알지

나는 이제 엄마의 마음보다 내 마음을 알아야 한다.


엄마의 병원비를 내는 것은 딸로서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다. 칭찬받자는 건 아니지만 무안받고 싶었던 것도 결코 아니다. 그러나 결국 무안해졌다. 엄마를 걱정하고 위하는 내 마음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으로부터 부정당할 때, 수치심이나 무안함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차였을 때,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용서받지 못했을 때,

최선을 다했지만 성의가 없다는 평가를 받을 때 등등.

그러니까 이때의 무안하고 속상한 나의 감정은 자연스럽다. 나라도 놓치지 말고 잘 알아주어야 하는데,

자칫 놓쳐버리면 내 존재를 스스로 까내리기 바빠지게 된다.

왜 나는 엄마에게 도움이 안 될까.
도움은커녕 왜 스트레스를 주는 딸일까.
엄마는 왜 주기만 하고 받지 않을까,
마치 나에게 빚 갚으러 온 사람처럼.


감정을 내가 알아주지 못하면,

스스로를 고리대금업자로까지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다 사실이 아니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내 감정이 갈 길을 잃으면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내 감정이 잘못 불러일으킨 생각들이다.

내가 엄마에게 도움 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이다. 엄마의 스트레스는 당신의 예민하고 강박적 기질 탓이지 나 때문이 아니다.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만약 엄마가 상대의 감정을 잘 받아주는 사람이었다면, 엄마로부터 인정받고 듣고 싶었던 감정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엄마가 걱정됐구나, 엄마는 괜찮다. 병원비는 엄마가 낼 수 있으니까 내지 마라, 마음 써 주는 것만도 고맙다.


병원으로 오는 동안 온갖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엄마가 없으면 내가 살 수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 할미가 없으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슬픔을 견딜까.

불안하고 두려워서 부러 유튜브를 크게 틀어놓고 운전했다. 큰 일은 아닐 거라며 입담 좋은 강사의 말에 반 박자 늦게 따라 웃으며 온 것이다.

엄마에게서 저 따옴표 속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마흔 넘어 너무 큰 욕심이다.



결국 병원비를 내지 않고 집으로 왔다.

대신 동네에 새로 생긴 반찬 가게에 가서 여러 개의 반찬을 샀다. 종일 병원에 있느라 준비하지 못한 저녁 때거리 걱정을 엄마가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 온 반찬 역시 칭찬은커녕,

'먹지도 못할 반찬 비싸게만 주고 사 왔다'는 혹평이 쏟아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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