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들이 아이들을 초등 시절부터 논술학원에 보내는 이유 중 하나는 중고등학교의 수행평가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내 경험만 해도, 수행평가의 대부분은 글쓰기다. 표현을 통해 사고 과정을 평가하려면, 말하기보다 글쓰기가 적합하다. 말하기를 토대로 한 구술평가에 학생들이 특히 부담을 느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글쓰기를 토대로 한 수행평가라는 것이 챗지피티 때문에 의미가 없어도 한참 없다.
'수업을 통해 배운 소설 분석의 방법 중 한 가지를 적용하여 작품의 주제 파악하기'
최근에 내가 한 수업은 소설 분석하기였다.
인물의 공통점과 차이점, 반복되는 소재나 상황을 살펴 서사 구조를 읽어내고 주제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나는 한 학기 내내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수업해 왔다.
평가를 위해서는 새로운 작품을 주고 배운 바를 적용케 하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고등학교 수업이란 게 늘 진도에 쫓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학습지에 필기한 내용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쓰는 '복습'에 가까운 글쓰기로 구성했고, 수업 중 2차시를 배정했다. 학생들에게 미리 예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제는, 평가의 내용을 확인한 아이들이 집에서 챗지피티로 돌려본다는 것이다. 달달 외워서 수업시간에 쓴다 한들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좋다, 관대하게 생각해서 그것 또한 공부다.
"집에서 AI의 도움을 받아서 완성된 글을 연습해 볼 수는 있지만, 그걸 수업 시간에 똑같이 베끼지는 말자. 그것도 공부의 과정이니까 한 번 읽고 쓴 문장을 최대한 내 언어로 꺼내는 연습을 해 보자."
한 학기의 절반을 할애해 수업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대상 텍스트로 학생들이 수행평가를 치른다. 그런데 웬걸 , 소설에서 벗어난 엉뚱한 내용으로 문장을 얼기설기 엮은 글들이 반마다 두세 편쯤 있다. 주인공 허생원이 하지도 않은 말이 등장하고, 주제 또한 수업에서 논의한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마도 지피티에게 답변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하지 않고 다짜고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그대로 입력했을 가능성이 컸다. 지피티의 세상에서 '메밀꽃 필 무렵'은 소설일 수도, 메밀 소바집일 수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오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 학생은 내가 교실을 천천히 돌아다니며 등을 보이는 사이에 실시간으로 지피티 검색을 하고, 결과를 그대로 베꼈다. 슬그머니 그 학생 옆에 서니, 곰곰이 생각하는 척을 하며 쓰기를 멈추거나 짝지와 맥락 없는 대화를 한다. 그 학생에게는 결국 최하의 점수를 주었다. 나중에 나에게 따지는 말이, 다른 반에서도 다 지피티를 보고 썼다는데 나는 왜 안되냐는 것이다. '집에서 지피티를 활용해 읽고 써보되, 평가 중에 검색하거나 써온 것을 베끼는 건 안된다'라고 안내한 것을 학생은 듣지 못한 모양이다.
이제는 수행평가를 시작하기 전에 챗gpt활용법을 먼저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된다.
- 소설의 줄거리를 먼저 입력하는 등 지피티에게 과제의 맥락을 먼저 제공할 것
- 과제에 필요한 조건을 상세하게 제시하며 답을 얻을 것.
- 결과물은 그대로 옮기기 전에 반드시 읽어보고 나의 의도에서 벗어나거나 틀린 내용이 없는지 확인할 것.
그라나 공부와 담쌓고 지낸 아이들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지 활동이 조금이라도 첨가되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번거롭다.
<아무튼, 인터뷰>의 은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뭘 알아야 물어볼 게 있다.
질문은 앎을 토대로 더 나은 앎을 찾아가는 일이다.
질문의 시간은 공부의 시간 다음에 온다.(83쪽)
물론, 챗gpt에 물어보는 일은 인터뷰가 아니다. 그러나 '앎을 토대로 더 나은 앎을 찾는다'는 것은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아무것도 모를 때 gpt는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공부의 본질은 성실함이다. 시대가 변해도 공부는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 셈이다. 그리고 성실함은 ‘무엇을’ 배우는가 보다 ‘어떻게’ 배우는 가를 결정짓는다. 배움에 있어서 자기 몫이 더욱 커져가는 시대에 '성실'의 덕목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지, 교사로서 엄마로서 고민이 깊어진다.
배움만큼이나 가르침 역시 성실함이 전부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