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에게 말 걸기, 박동수
제주의 표선으로 숙소를 정했던 이유는 거기 살고 계신 윤지영 선생님(오뚝이샘)을 뵙고 싶어서였다. 최근에 출간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특히 더 바쁘실 텐데 감사하게도 시간을 내주셨다. 2월에 신간이 출간되는데, 이번에는 자전적 내용을 담은 에세이라고 한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책이지만 나는 그 내용을 알 것 같다.
결국 '사랑'이라고.
선생님은 계속 '사랑'을 배우는 분이다. 스스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잘 표현하고 전할 수 있는지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신다.
내가 경험한 선생님의 사랑 표현 방식 중 하나는 '상대방(아이)에게 궁금함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대화는 표면적으로 육아나 교육에 관한 고민이지만, 실은 고민하며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주제로 한다.
선생님은 늘 나에 대해 질문하신다. 그리고 나는 선생님의 질문 앞에서 내 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한 번도 표현해 보지 않았던 문장을 꺼내기도 한다.
대화 끝에 이르는 통찰은 왠지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놀랍고 소중한 경험이다.
그날도 선생님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레 엄마 이야기가 나왔다. 제주도에 오던 날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면 아침 여섯 시에 집에서 나서야 했다. 공항에서 아침 먹으면 된다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엄마는 새벽 다섯 시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 누룽지를 끓여서 식탁에 다섯 그릇을 올렸다. 누룽지를 후후 불어 먹느라 아이들은 수월하게 잠이 깼고 따뜻해진 몸으로 출발했다.
'덕분에'로 끝난 에피소드지만, 그래서 더 내 마음은 복잡했다.
엄마와 나의 내밀한 역사를 다 알고 계신 선생님은 그런 내 마음을 대번에 읽어낸다. 그리고 딸이자 엄마로서 살아가는 내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재료로 쓰신 다음, 응원까지 해 주신다. 그냥 응원해요! 가 아니라, '선생님의 서사를 책으로 써요!'라는 말로 표현하신다. 그러면 나는 내 이야기가 책이 되려면 어떤 내용을 어떤 순서로 담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나와 엄마의 삶을 또 한 번 있는 그대로 수긍하게 된다.
선생님의 응원이 진짜 힘이 되는 이유다.
핸드폰, 물, 콩나물 이런 건 확실한 모습이 있어서 절대 오해를 안 하잖아요
우리는 비슷해도 유형인 것은 다 구분을 하고 오해가 없는데 사랑은 무형이라서, 확실한 형태가 없어서 다 제각각인가 봐요. 어떤 사람은 음식 해주는 걸 사랑이라 여기고,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 좋은 말을 사랑으로 여기고 다 제각각 사랑의 형태와 구조를 다르게 가지고 있는데 그 상태에서 모두가 오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의 구조가 뭐냐고 한다면 다정함, 온유함, 따뜻함, 이런 형용사로 곧장 느껴지는 말이나 행동 같아요.
- 윤지영
선생님은 우리 엄마가 절대 다정하고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이 많은 엄마가 될 수 있었느냐고, '궁금하지만 알 것 같다'고도 덧붙이셨다.
우리 엄마는 하루에 많으면 열두 번도 더 넘게 밥을 차린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마다 다섯 명이 한 식탁에 모이는 게 쉽지 않다. 아이들 일어나는 시간, 각자 잘 먹는 반찬, 학교 갔다 와서 간식 먹는 시간, 우리 부부의 퇴근시간 등 모두 제 각각이다.
엄마는 다섯 식구들 모두 입이 짧다고, '뭘 해줘도 잘 안 X 먹는다'라고 욕을 할지언정 끼니를 여러 번 치우고 또 차려내는 일에 한숨 한 번 쉰 적이 없다. 그래서 나 역시 엄마의 잔소리를 사랑으로 번역하는데 이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부모가 되려고, 그래서 사랑이 많은 아이로 키우려고 애쓰는데, 나와 엄마를 보면 그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부모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면 아이는 제 방식대로 큰다. 나는 그렇게 배웠고, 배운 대로 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물론 지금도 엄마와 생활하는 일은 불화의 연속이다. 하지만 예전엔 소통이 없어서 불화도 없었을 뿐이다. 요즘은 할 말이 있을 때 '전화'한다. 얼굴 보고 잔소리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다 보면 항상 파국이다. 전화한다는 건 그만큼 물리적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의미, 몸이 멀어져서야 배려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핸드폰 너머로 보이지 않는 얼굴을 상상하며, 각자 버텨온 시간까지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시옷쌤에게 엄마의 말과 행동이 다정함, 온유함이라는 형용사로 곧장 느껴지지 않게 가로막히는 무언가가 있었고, 지금 시옷쌤의 가정에서는 그 가로막힘이 없어진 거죠.
- 윤지영
이렇게나마 소통이 가능한 지금,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는 그 '가로막힘'이 뭘까.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돌봄 노동에 생을 다 바치는 중이다. 다만 그때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간병은 엄마가 아니면 정말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고 여긴 일이었고, 그래서 정작 당신 자신과 딸이었던 나는 돌봄의 대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살림과 육아를 돌보는 일은 엄마가 기꺼이 선택했다. 여전히 당신이 빠져 있어 아쉽지만 그런 삶을 좋고 나쁨으로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동료에게 말 걸기>에서 4장을 공들여 읽었다.
그리고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쳤다.
하은빈 작가의 이야기('우는 나와 우는 우는')는 사랑이 돌봄에 잠식될 때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사랑이라는 둘의 무대를 단 한 사람만 지탱해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사랑일까? 사랑에는 돌봄으로 환원되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돌봄이 사랑을 대체할 수 없듯이 사랑이 돌봄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랑과 돌봄을 모두 지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철학자 에바 페더 키테이를 따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길이 결코 단 하나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동료에게 말 걸기', 박동수, 105쪽
돌봄이 사랑을 대체할 수 없는 법인데, 우리 엄마는 여전히 돌봄으로 사랑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 키테이의 말처럼 사랑과 돌봄을 모두 지키는 일이 단 하나일 수 없다. 게다가 돌봄과 사랑의 무대를 두 사람이 함께 지탱하고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지금 엄마와 내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가족, 곧 정정 가능성의 공동체란 이미 동질적인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로의 말과 행동을 정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유동덕인 연합이다. 가족 구성원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때로 상처도 주지만, 동시에 관계를 유지한 채 서로를 바꿔 갈 수도 있다. -같은 책, 67쪽
어제는 엄마에게 김밥 마는 법을 배웠다. 며칠 전 엄마 앞에서 내가 싼 김밥을 썰었는데 흐물흐물하게 다 터졌다. 김밥을 이렇게 싸면 어떡하냐고 잔소리를 시작하는 엄마에게, 나는 나대로 '뱃속에 들어가면 똑같아~'하고 능청을 떨지만, 능청은 절대 잔소리를 이기지 못한다.
"단단하게 마는 게 난 어려운 걸 어떡해~"
"자꾸 해봐야지~"
"해도 안 된다니까~"
김밥을 단단하게 말려면 '재료를 꼭꼭 눌러 최대한 공간이 없게끔 해야 한다'고 일흔의 엄마가 마흔 넘은 딸에게 시범을 보여가며 가르쳤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엄마는 엄마가 먹을 김밥을 쌌다. 손은 엄마의 김밥을 꾹꾹 누르는데, 눈은 내 김밥에 와 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터지지 않는 단단한 김밥을 쌌다.
엄마 덕분에 절대 터지지 않는 다섯 식구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