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소설 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함께 도전하는 사람들은 소설 쓰기의 경험이 조금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정말 처음이라 완성이나 가능할지 걱정이다.
의외로 글감은 쉽게, 빨리 정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써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그렇게 떠오른 사건이 얼마 전 부산에서 일어난 여고생 세 명의 투신 사건이다.
그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는 우리집과 삼십 분 거리, 한때 드라이브 삼아 자주 오가던 길이다.
'예고'라는 이름 때문에 이유 없이 멋져 보이는 학교였고, 여기를 다니는 학생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궁금하기도 했던.
혼자가 아니라 셋이니까 함께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기 전, 조각 수준의 기사를 접하고 내가 한 생각은 그 아이들에게 정말 폭력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의 투신이라니 물론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했지만, 공감이라곤 전혀 없는 무책임한 생각이다.
그런 내가 싫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선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소설로 옮길 생각을 했다.
기사 검색에 들어갔다.
포털 기사에서 제목만으로 단편적으로 이해했던 수준보다는 좀 꼼꼼히, 관련 기사는 되도록 다 찾아 읽었다.
머릿속에 질문은 계속 품고 있었다.
무엇이 가장 절망스럽게 했을까.
나였다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관행처럼 굳어진 사학의 구조적 비리, 입시판과 학교의 결탁, 관행에 따르지 않는 학생에 대한 인격적 모독과 추문 퍼뜨리기 등 어른이 겪어도 감당 못할 복합적인 요인들이 촘촘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을 시작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1인칭과 3인칭을 오가고, 배경을 바꿔 보기도, 사건의 순서를 달리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첫 단락을 쓰고 난 뒤에 문득,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아.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구나. 혼자가 아니라 세명, 네 명, 열명이라 해도 넘어갈 수 없는 견고하고 부정 의한 어른의 서계가 있었구나.
아이의 일기장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무용하는 어른들이 정말 싫다'라고.
소설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아이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고,
일기장의 한 줄에서 자기 자신을 해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전해져 왔다.
무용하는 어른들이 정말 싫은데,
그럼에도 무용을 계속하고 싶은 자기 자신이 더 싫은 마음.
내가 사랑하는 세계에서 추방되거나,
내 발로 나가거나.
둘 중 무엇을 선택해도 죽을 만큼 괴로웠을 마음을 그나마 조금 알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초고의 절반까지 쓰고 멈춤 상태다.
<토우의 집>을 쓴 권여선 작가가 '언제나 고통 앞에서 내 언어는 무력하다'던 말을 조금 알 것 같고,
한강 작가가 5.18과 4.3을 담은 소설을 완성한 뒤 '더 이상 학살을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한 마음을 또 조금 알 것 같다.
무엇보다
안다고,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문장이 어쩌면 나중에 부끄러워질 것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
서평을 쓸 때도, 에세이를 쓸 때도 '쓰기'가 이렇게 절절한 읽기인 줄 체감하지 못했다
소설을 쓰며 읽기는 쓰기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마도 소설 쓰기에는 실패하겠지만,
나의 읽기_책과 사람, 혹은 세상_는 실패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