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을 아이들 다툼 소리에 일어나면 예민해진다. 예민해질수록 감정적이지 않으려고 말투에 중립을 실어보지만 스르르 중립 기어가 풀려버린 엑셀처럼 감정이 미끄러져 나간다, 제삼자에게.
오늘 그 3자는 큰아들이다. 또 열한 살이 첫째다.
동생들이 목소리를 높여 자기주장만 하는 상황에, 내 인내심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첫째의 한 마디.
시작은 작은 오빠랑 보드게임을 했는데 내리 세 판을 진 막내딸의 일방적인 징징 거림이었다.
아직 한글도 못 뗀 6살이 8살 오빠랑 게임을 해서 이길 리 없고, 안타깝게도 일부러 져 줄 아량이 8살 오빠에게도 없다. 그 8살 오빠 역시 11살 형아랑 게임하는 번번이 졌고, 나는 왜 지기만 하는 거냐고 징징거릴 때마다 어르고 달래고 훈육하느라 나는 꾸준히 진이 빠지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혼낼 일이 아니다, 화내지 말자, 감정적이지 말자,
이기고 싶은 마음은 좋은 거야, 똑똑해서 그런 거야,
이너피스를 열 번쯤 외고는 한다.
6살 : 나 다 졌어 나만 맨날 다 지고! 엉엉
8살 : 막내야 A 게임하면서 오빠도 3번 졌었어.
11살이 : 아니야. 너 4번 졌어.
8살 : 응?
11살이 : 총 5판 했는데 그중에 4번 졌다고.
마지막 문장은 실제로는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말이었는데, 어쨌든 그 말에 나의 분노 기어가 풀렸다.
아니 지금 몇 번 졌는지가 중요해? 너 기억력 정확하고 똑똑한 거 다 알겠는데 그걸 이럴 때 써야겠니? 둘째 딴에는 동생 달랜다고 하는 말인데, 너는 형이 되어서 네가 몇 번 이겼고, 동생이 몇 번 졌는지 확인을 해 줘야 돼?
내뱉진 않았고. 나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자동적 사고다.
아차.
말로 내뱉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방금, 이글을 쓰면서 알아챈다.
첫째의 저 말은 중의적이다. 좋게 볼 수 있고, 안 좋게 볼 수 있는데 예민해진 나는 안 좋게 보고 말았다.
막내 동생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빠들도 많이 지고 산다고.
너 두 번 질 때, 오빠는 세 번 네 번 진다고, 그러니까
속상해하지 말라고.
그게 나름.. 제 딴엔 위로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나는 왜 자동적으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을까.
엄마 주도적으로 공부하는 아이가 잘 따라오지 않고 있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밤새 고민하고 난 뒤라서 그렇다. 평소에 교실에서 만났던 전인적으로 완벽해 '보이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욕심을 내기도 하는데, 슬슬 세모눈을 뜨고 말이 짧아지는 사춘기 초입에 선 첫째를 어떻게 인성적으로 학업적으로 완벽하게 키울 것인가 욕심부린 탓에 불안이 높아졌다.
자기 할 일을 야무지게 잘 챙기면서도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할 줄 아는 아이, 귀찮은 일에도 스스로 나설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픈 엄청난 욕심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똑똑하지 않더라고 착하길 바란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으니, 똑똑한 머리를 동생 달래는 데 쓰는 전인적 어린이의 모습이 온전히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어제 물멍 하는 나를 보더니 (마침 어항 안에 있는 물고기 열한 마리) 왜 그렇게 어항만 들여다보냐고 아이들이 물었다.
조용해서. 물고기들은 안 싸우거든.
열한 살이 : 엄마, 좋은 점이랑 안 좋은 점 하나씩 있는 거랑 둘 다 없는 거랑 뭐가 좋아요? 나 : 좋은 점 안 좋은 점 하나씩 있는 거. 열한 살이 : 우리는 싸울 때 시끄럽지만 대신 재밌게 놀고 웃는 소리도 크잖아요. 물고기는 싸우는 소리도 안 들리지만 웃는 소리도 안 들려요. 맞죠?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희한하게 날씨는 내 마음 같다.
어떤 일을 '잘못된 일'로 해석하는 단호한 의지가 부족하면 어떤 일을 '잘된 일'로 알아볼 가능성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일을 너무 쉽게 '잘못된 일'로 해석하면 스스로를 계속 막다른 골목으로 몰게 된다. 분노의 주목적은 행동하는 힘을 일으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