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명과 함께 있어도 그와 나만 우리의 농담을 알아듣고 같이 웃었다. 그리고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고 나면 이미 웃음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김이 새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잘 통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 유머를 쓸 기회가 많지 않았다. 결혼 초기는 자주 싸워서 유머가 낄 자리가 없었다. 아이를 낳아보니 우리는 한 집에 살고 있었지만 다른 시간대를 살았다. 밤새 수유하고 자는 아이 기저귀도 갈아주며 밤잠을 설친 나의 아침은 늘 피곤했고 늦게 시작되었다. 남편은 이미 이른 아침에 출근하고 없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서 모닝콜을 끄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챙겨 먹고 머리를 말리는 소리는 나에게 '무음' 과도 같았다. 나의 오감은 오직 아이들과 관련된 것에만 반응했다.
연애 2년과 결혼생활 15년 동안 그의 유머는 더는 발전을 하지 않았다. 가끔 만나는 친구는 나의 남편과의 대화를 퍽 즐거워하지만, 나에겐 이미 오래전에 다 읽혀버린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남편은 고집이 아주 세다는 것을. 지금도 주구장창 같은 유머만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이 십 대에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졌을 때 '나미'의 "슬픈 인연"을 참 많이 불렀다. 지금은 너무 슬프지만, 너는 후회할 거고 다시 돌아올 거라는 노랫말, 하지만 다시 돌아온다 해도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자조적인 가사가 나에겐 참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을 해서 살아보니 이 노래는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결혼을 해서 " 슬픈 인연"의 노래가 되었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은 바래진 기억으로 그리워라도 할 수 있지, 남편은 그 조차도 할 수가 없다. 미움과 후회만 남아 쌓이고 쌓인다. 그 수많은 세월 동안 나는 그는 어떻게 변해갈까? 우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Over the rainbow"노래를 좋아한다. 파랑새들이 날아다니고 상상하던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 근심은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그곳,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내가 꿈꾸는 삶이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사람의 모질고 냉정한 말 너머로는 실제로는 따뜻한 본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날 외롭게 하고 내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하고 외면함에 이 사람은 몰라서 그러는 거라고, 그 차갑고 무심한 행동 뒤에는 내가 모르는 포근함이 있을 거라고 믿어왔었다. 하지만, 나는 바보였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무지개를 건넜고, 그 너머로는 단지 내가 인정을 하지 않은 세상이 있어왔다는 걸 알았다. 그동안 내가 느껴왔던 외로움과 쓸쓸함과 힘듦의 원인이 바로 '유머 코드가 맞는 그'와의 불협화음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단지 "아"라고 했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속에 담긴 모든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그 "아"라는 외마디에도 우리는 마음이 상하고 싸우고 만다.
어쩌면 결혼은 복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첫 마음은 설렜으나 마지막은 역시 후회한다. 행복한 결혼을 꿈꿨으나 현실 앞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 가고 있다.
내가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눈만 감고 있어도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라서, 책 속의 그 당연한 결말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결혼은 '사랑'의 감정으로 시작하지만, 그 중간과 끝은 '사랑'의 감정은 어쩌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인어공주"는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많은 동화책 속의 당연한 사랑과 결혼을 하지 못했다. 동화책 중에서 가장 현실감이 있다. 결혼은 진정한 사랑과 노력, 희생이 필요하다. 그래도 행복하기는 쉽지가 않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관계의 '성장'을 얘기한다. 안나는 사랑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린다. 새로운 연인을 사랑했음에도 결국 '의심, 집착, 불안'으로 스스로 죽고 만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주인공은 안나가 아니었다. 레빈과 키티였다. 책 속의 다른 커플들과는 달리 그들은 서로 배려하고 희생하면서 그들의 결혼생활을 지켜나갔다. 결혼은 서로의 관계를 통해서 나와 그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계속 사랑타령만 했다가는 상대방보다도 내가 먼저 나가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십 대 후반에 새로운 연애를 하고 나이 서른에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천생연분'은 애초에 딱 정해놓은 인연인 줄 알았다. 그래서 시시한 연애를 하고, 큰 이변 없이 결혼을 할 적에는 마음이 헛헛할 때도 있었다. 천생연분이라면 훨씬 더 사랑이 넘치고 싸움도 하지 않고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으니까. 어쩜 난 아직 '천생연분'을 못 만났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작년 여름에 엄마, 아버지를 이년만에 뵀을 때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우리 엄마, 아버지는 지금도 싸우신다. 조금 평화롭다가 기운을 차리시고 다시 싸우신다. 아버지는 급한 성격에 화를 내시고, 엄마는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두 분이 싸우시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참 아프다. 동등한 입장에서의 배우자가 아닌 가부장적인 남편과 희생적인 아내 , 가끔은 서로 간에 험한 말도 오갔다. 두 분은 오랫동안 함께 하면서 여섯 명의 자식을 두셨고,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셨다. 행복했던 기억도 힘들었던 기억도 모두 함께 하셨다. 지금도 두 분은 건강하시고, 함께 밭에 가셔서 고추를 따시고 건강한 식사를 같이 하신다. 그리고 기운을 차리시면 또 좀 더 싸우신다. 물론 어쩌다가 농을 던지며 웃으시기도 하신다. 자식들이 전화하면 안방과 거실에 놓인 두 대의 전화기를 동시에 들고 엄마는 아버지를 아버지는 엄마를 자식들에게 고자질하신다. 나는 어떨 땐 그만 크게 웃고 만다.
'싸운다'라는 건 아직도 내면의 성장이 필요하다는 말도 되지만, 상대방에 대한 서로의 열정을 여전히 거두지 않음도 뜻한다.
이웃에는 혼자 사시는 나이 드신 분들이 계신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며 시간을 때우시고, 말할 상대가 없다. 밥도 대충 챙겨 드실 때가 많다. 하지만, 엄마, 아버지는 서로의 옆에 계시고, 엄마는 시골의 5일장을 기다리신다. 이것저것 장 봐서 맛난 걸 해서 같이 드신다. 두 분은 서로를 필요로 하신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다. 단지 그걸 모르고 계실 뿐. 그런 걸 보면 천생연분의 조건은 두 분이 오랫동안 함께 사는 삶이 아닌가 한다. '천생연분'은 결혼생활이 시작할 때가 아니라, 삶의 마지막에 정해지는 인연인 것 같다.
나도 여전히 마음이 맞지 않는 나의 남편이지만 같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 혼자이기는 싫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천생의 연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흐르는 세월 속에서 여전히 속 상하고 싸울지라도 그게 바로 당연한 결혼생활이라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호징냐, 나의 쪽배"에서 어린 씨앗의 탄생을 도와준 '비'님이 말했다. "앞으로 네 인생에서 비가 오고 난 뒤에는 항상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라고. 땅속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작고 여린 깐지라나 나무는 빗 속에서 혼자 떨어야만 했다. 그러나 비님이 말한 대로 삶이란 풍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살다 보면 비가 올 때도 있고, 해가 날 때도 있겠지만, 오래오래 서로의 곁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결혼이 힘든 나에게도 내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말이다. 난 다시 "Over the rainbow"를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