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를 아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곳에서 나는 지난 10년 동안을 살았고, 또 얼마를 살지는 모르겠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이 도시에서, 나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 이 곳에 온 나는 친구가 없었다. 어린 아들을 친구 삼아 공원에 나갔었다. 그러다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을 붙잡고 나의 외로움을 호소했었다. 얼마 후, 남편은 아파트 관리인에게 편지를 보내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한국사람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리고 마트에서도 우리 아이와 또래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의 부모에게 용기 내 말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낯선 그들을 초대했다. 잔칫날이나 먹을 듯한 음식(잡채, 김밥, 월남쌈, 불고기 등등)을 준비해 놓고, 그 첫 만남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차츰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나가게도 되고, 놀이방에도 무리 지어 다니게 되었다. 우린 모두 가족 없이 떠나온 이곳에서 외로웠다. 그리고 무리 속의 일원이 되어 행복했다.
우리는 많은 걸 공유했다. 누군가가 좋다 하면 더는 생각하지 않고 결정했다. 마트의 재료부터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도 그리고 아이들 학교 선택과 과외 선생님까지도. 주말에 방문하면 좋을 곳과 근처 다른 나라의 쇼핑몰까지, 소소한 정보들이 엄마들 사이에서 근원지도 모르는 채, 유행처럼 퍼졌다. 어떤 것들은 한국보다 여기가 좀 더 싸니 무조건 사야 하는 것처럼 서로를 부추기기도 했다. 나도 사고 너도 사고, 내 집에 있는 게 다른 사람의 집에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같아짐에 안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똑같은 생활이 반복될 것처럼 생각되던 어느 날, 내가 만나던 친구들이 이 곳을 떠나갔다. 나의 아이들은 자라나서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를 안정적으로 다니게 되었다.
{ 유럽의 어느 나라에 한 작은 도시가 있다. 그곳에 많은 한국 회사들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어린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과 학교에, 도시의 거리와 집들에 한국 사람들이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다.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주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오거나 다시 떠나기는 한다.
우리는 대부분 서로를 안다. }
이곳에서는 내가 아는 일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사람에 대한 정보나 사건쯤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안 된 사람들도 배경지식으로 쉽게 알 수 있는 곳이다. 입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이면 당연히 누군가를 얘기하게 되어 있고, 그 속에서 말을 섞진 않아도 은근히 즐거운 마음이 드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들을 멀리하게 된다. 또는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더 가까이하게도 된다. 사람마다 다르니까.
외국에서 한국사람을 만나서, 한국말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아는 한 외국인은 이곳에 같은 나라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심지어 남편마저 다른 나라 사람이다. 나는 친구를 골라서 만날 수 있고, 같은 시간을 살며 마음을 나눌 수도 있다. 대단한 축복이다. 하지만 그 축복이라 생각하며 만들었던 인연의 끝이, 같이 나누었던 말들이 비수가 되어 나에게도 꽂히는 날이 왔다. 좋음만 함께하다 짧게 머물다 가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나의 끝을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끝을 보기도 하면서 오래 머무는 사람도 있다...
가족보다 더 가까이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인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 그 끝을 돌아 돌아 몇 년이 흐른 뒤, 아직도 남아있는 우리들은 진정한 친구를 알아보고, 마음을 닫지 않고 기다렸던 시간을 서로 알아봐 주게 되었다. 서로에게 상처 줬던 시간들이 수년이 지난 어느 날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보고 대화를 해도 괜찮은 관계가 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나의 평안처럼, 친구들의 평안도 나에게 큰 고마움이 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게 또 있다.
그 긴 시간을 지나 홀로 담담히, 생각하던 내가 이제서야 조금씩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무리 속에 있지 않다. 나는 이제 그들이 사는 걸 똑같이 사지 않는다. 작은 탐험가가 되어 나만의 물건들을 사기 시작했고 새로이 발견해 나가는 소소한 기쁨을 알게 되었다. 실패하면 다음번에 다른 선택을 하면 되었다.
나는 듣기 싫어도 들어야 했던 언어의 소음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처음 보는 사람이 짓는 미소로도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나는 뒤늦게 이 곳의 언어를 배운다. 비록 서툴더라도 단어 하나와 몸짓 하나로 통했을 때의 기쁨은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순수해서 함박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내 마음속에 숨어있는 보물들을 찾는 시간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혼자 조용히 걸으며 어떤 보물들을 발견하게 될지 기다려지는 날이 왔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과거가 멀어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생각나고 가까워진다. 사십 대 중반의 나는 이십 대의 나보다 유년시절의 나와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눈 앞의 유혹에 마음을 뺏기던 이십 대의 나보다 더 나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이제 나는 그때의 상처를 꺼내보고 어루만져줄 수도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못남을 더는 포장하지 않는다. '나의 말과 행동이 참으로 부끄럽구나' 하고 그냥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좋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다시 지나간 일들을 겪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다시 알을 찾았다. <데미안> 은 성장을 위해 자신의 알을 깨라고 했지만, 나는 세상 밖에서 나의 알로 돌아가 나의 세상을 다시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