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밥 한 공기

by Jane Anne


공원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시소를 탄다.
큰 아이는 왼쪽에 작은 아이는 오른쪽에.
작은 아이가 앉은 시소가 아래쪽으로 내려가질 않는다. 바라만 보다 나는 작은 아이 쪽 시소를 힘주어 아래로 툭 내린다. 그 바람에 큰 아이는 잠깐 하늘로 올라갔다 세게 엉덩방아를 찧는다. 아프고 긴장되면서도 맘껏 소리 지르는 즐거운 순간이다. 그리고 다시 올릴 때는 큰 아이가 발돋움 못하도록 힘줘서 천천히 올린다. 그땐 큰 아이의 투정 섞인 소리도 작은 아이의 즐거워하는 소리도 나의 기억 속으로 함께 들어간다.

난 시소가 꼭 방아를 찧는 거 같다.

추석 즈음에는 논 한 귀퉁이의 벼를 베어 방아를 찧어서 찐쌀을 만들었다. 추석날 그 찐쌀로 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아침으로 먹었다. 찐쌀은 그냥 먹는 것도 부드럽고 구수했다.
어린 나였지만,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힘든 줄도 모르고 천장에 매달린 줄을 잡고 까르르 웃으면서 발로 방아를 찧었다. 마치 시소를 타며 즐거워하는 나의 아이들처럼.


나는 외국으로 나올 때 엄마, 아버지가 논에 우렁이를 넣고 직접 키우신 친환경 쌀 20kg짜리 2자루를 컨테이너에 싣고 왔다. 그리고는 이 곳에서 더는 엄마, 아버지의 쌀을 먹어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체코에 있는 한국 마트에서 쌀을 샀다. 이 곳에서도 '이천쌀'과 '한국미'를 살 수 있었다. 참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 후 얘기를 들어보니, 이 쌀들은 품종은 같지만, 생산지는 '미국'이라 하였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배달해서 먹기도 힘들고 꼭 한국 품종의 쌀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여기 마트에서 조금씩 쌀을 사 보기 시작했다.

나는 농부의 딸이다. 뚫어지게 봉지를 쳐다보다 보면 거기에 쓰인 말들은 몰라도 제법 괜찮은 쌀들을 골라올 수 있게 되었다. 외국에서 제일 안전한 방법은 같은 품목의 물건 중에서 제일 비싼 물건을 고르는 것이다. 아무러면 비싼 값을 하겠지, 이유가 있겠지, 하는 바람으로 사 보지만 무던한 나는 그 차이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작은 모험가가 되어 이것도 사보고 저것도 사본다.

이 곳의 마트에도 쌀 판매대가 있다.

대체로 밀가루처럼 1kg씩 포장되어 있다. 가늘고 길쭉한 쌀, 둥근 쌀, 현미, 보리, 수수, 귀리 등과, 같이 섞어 먹을 수 있는 검은 쌀, 검정콩, 누른 콩, 렌틸콩, 퀴노아 등 종류가 많다.



이제는 제법 먹는 것과 관련해서는 원산지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근처 동유럽을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원산지 중에서 둥글고 찹쌀이 섞인 것이 나에게는 대체로 맛이 있었다.

이 곳의 레스토랑에는 사이드 메뉴로 감자의 종류(프렌치프라이, 웨지감자, 감자전, 감자크로켓, 버터를 곁들인 삶은 감자 등등)가 많긴 하지만, 밥도 고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에 여러 나물을 섞어서 먹는 게 비빔밥이고 김안에 넣어서 먹는 게 김밥이듯이, 이 곳 사람들의 샌드위치는 빵이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빵 안에 여러 채소와 햄과 치즈를 넣어서 먹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에 밥을 말아먹지만, 이 곳 사람들은 빵을 수프에 적셔서 마지막 국물까지 먹는다.
단지 주식이 쌀과 밀로 다를 뿐이다.


우리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밥은 '공깃밥'이다. 매번 한국에 갈 때면 식당에서 파는 그 공깃밥을 그렇게 좋아한다. 그래서 꼭 추가로 시킨다. 혀의 감각이 탁월한 우리 아들에게는 그게 그렇게 맛있나 보다. 이 곳에서도 가끔은 "엄마, 나 공깃밥 먹고 싶어" 한다. 한 그릇은 기본이요, 추가로 시켜도 천 원이면 되는데, 그 공깃밥을 여기서는 시켜주기가 어렵다.
나는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는데 꼭 찰진 밥이 된다. 내 입에는 그냥 먹을만하고 맛있기만 한데, 우리 아들 입에는 아닌가 보다.

아무리 반찬이 맛있어도 밥 한 그릇이 맛난 게 최고의 반찬일 텐데...

그런데 오늘 전기밥솥으로 한 저녁밥을 먹고는 자기 전에 또 먹고 싶다며 밥을 달라고 한다. 처음 있는 일이다. 귀찮아도 기꺼이 즐거운 맘으로 밥과 고기반찬을 챙겨줬다.
전기밥솥이 우연히 생겼다. 아랫집에 사시던 분이 한국으로 가시게 되었다. 가실 때, 전기밥솥을 덥석 안겨주고 가셨다. 사용감이 있어 미안해하면서.
하지만, 크게 표시를 안 했을 뿐이었지 나는 그 전기밥솥을 받고 참 고마웠다.

( 전기밥솥을 살 돈은 충분했으나, 외국에서 사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리고 매번 많은 짐들에 밀려 다음으로 미뤄졌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방금 한 밥을 먹고 있다. 얼마 만에 먹어보는 따뜻하고 고슬고슬한 밥인지.

맛있고 배부르다.
그리고 스르륵 잠이 온다.
입가나 소매에 밥풀 하나 묻혀도 뭐라 할 사람 없는 편안한 집에서,
애써 허리띠를 풀 필요도 없는 늘어나는 고무줄 바지를 입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는다.

그저 따뜻한 밥 한 그릇으로 오늘은 충만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