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ne Anne
Jun 26. 2020
자신의 세계를 가꾸는 사람 ( 우리 아버지 )
그땐 힘들었더라도 지금은 아름답다.
2020.02.04
우리 아버지는 시골의 작은 우체국 집배원이셨다.
그 직업으로 정년퇴직을 하시고, 퇴직금의 일부는 받고 일부는 연금으로 매달 받으신 지 삼십 년이 넘으셨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빈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하실지 몰라 방황하셨던 거 같다. 밤늦게까지 시골의 어느 다방에 모여 조금 여유로워진 자금으로 화투를 치셨고 엄마와 부부싸움을 하셨다. 지금까지도 엄마는 그 얘기를 하시는 걸 보면 엄마에게는 많이 힘든 시간이었나 보다.
나는 이제 아버지가 이해가 된다. 십 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입대를 하고 나서 일 년도 안 되어 6.25 전쟁이 터졌다. 산속에서 포로로 잡혀 북한에서 몇 년 동안 강제노역을 하셨다. 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으로 비행기 타시는 걸 그렇게 무서워하신다.
몇 년이 흐른 뒤, 1953년 다행히도 아버지는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생사조차 몰라 눈물로 버티던 아버지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에 평생 다시는 고향땅을 안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큰 집과 쪽문 하나를 두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큰집 툇마루에 앉으면 언제나 우리 집에서 뭘 하는지 훤히 볼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꼼짝없이 동서 시집살이를 평생 하셨다.
우리 아버지는 매일 아침, 쪽문을 열고 가 형님께 문안인사를 드렸고, 저녁에는 배달 자전거를 세워놓고 바로 큰 집으로 가셔서 한참을 앉아계셨다 오셨다.
노년의 큰엄마, 큰아버지는 하루 종일 툇마루에 앉으셔서 우리 집을 바라보셨다. 아마 우리 집 바로 앞으로 나 있는 큰길 따라다니는 차들을 보셨으리라,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푸른 논들이며 야트막한 산과 파란 바다도 바라보셨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어릴 때 툇마루에서 우리 쪽을 바라보시는 큰엄마, 큰아버지의 눈길이 싫었었는데, 아마 아버지는 노년의 하릴없고 초점을 잃어가는 눈빛에 가슴이 미어졌을 거라는 생각이 왜 이제야 드는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생을 마감하시려고 오직 곡주만 드시던 큰아버지는 아랫집의 풍경을 가슴에 묻고, 큰엄마와 함께 딸이 사는 대구의 요양병원으로 강제 이주하셔야만 했다. 그 후, 일, 이년 곡을 끊으시고 큰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평생 부모처럼 섬기던 여섯 살 많은 큰 형님의 묘를 안고 아버지는 매일매일 울으셨다. 아버지에게 늘 불평을 늘어놓던 우리 엄마가 걱정하실 정도였으니까.
우리 아버지는 구순을 넘은 할아버지가 되셨다. 내 아이들에게도 그 멋지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신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하나하나 만들어 가신다.
가끔 나에게 수화기 너머로 노래를 불러주신다.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하신다.
왜 나는 아버지의 좋은 음성을 닮지 못했는지 속이 상한다. 물론 아버지의 높은 코도.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자전거를 타신다. 목적지가 산골 동네와 골목은 더 이상 아니다. 장터의 공치는 경기장으로 가셔서 10년, 20년이나 어린 할머니, 할아버지 틈에서 노익장을 뽐내신다.
그리고 한 달에 여러 차례 버스를 타고 군소재지로 가셔서 6.25 협회를 대표하신다. 앞으로 3년 동안.
봄이 오면 들길을 따라 넓게 펼쳐진 논과 밭을 돌아보시면서 다시 한 해 농사를 준비하시고, 고향산천의 계절을 만끽하신다. 그리고 글로 적어 우리에게 구순의 아름다운 감성을 들려주신다.
감자며 고추며 배추며 콩들을 수확하실 때의 우리 아버지는 낡은 와이셔츠에 끈으로 허리를 동여맨 오래된 바지를 꺼내 입으신다. 수건을 목에 걸치고 노래가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나오는 오디오를 챙기신다.
농사의 목적은 엄마, 아버지도 드시지만 많이 필요치 않다. 평생 동안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고마움을 표현하신다. 수확을 끝내고 나면 또 바쁘시다. 전국 여기저기 택배를 보내고 나서야 한숨을 돌리신다. 자식들은 기본으로 챙기신다, 철 따라 나는 고향의 재료들로. 직접 지으신 친환경 쌀까지.
우리 아버지에게 평생 직업은 시골의 작은 우체국의 집배원과 농부셨다.
그리고 조그만 집터와 논과 밭에서 고향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살아오시고 있다.
바람 잘 날 없는 다섯 명의 딸들과 한 명의 아들.
그리고 평생을 부부 싸움을 하고 계시는 늙은 아내, 서로에게 너무 필요하고 소중하지만 지금도 천생연분인 줄 모르시는 천상천하의 우리 아버지.
아직도 외출 많은 남편을 위해 칼주름을 잡아 다림질하시는 우리 엄마,
그분들에게는 이제 남의 잣대와 평가는 필요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저 그분들이 살아오신 그분들의 삶과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자신의 환경에서 자신의 멋을 누릴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 멋진 삶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이제, 나는 우리 아버지가 그냥 너무나 좋다. 자신의 지난 삶이 힘드셨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의 멋을 갖고 계신다. 품격을 키워가셨다. 지금도 외출하시기 전 '치~익'하고 뿌리시는 향수는 아버지만의 은은하고도 그리운 향과 어우러져 더욱 멋진 향이 된다. 물론 자전거 타고 가시는 아버지의 뒤로는 엄마의 한 바탕 잔소리도 퍼져나간다."지금 저 나이에도 무슨 향수를 뿌리냐고".
그러든가 말든가 우리 아버지는 콧노래를 부르며 자전거를 타고 500년도 훨씬 넘은 당나무 앞, 구부러진 길로 유유히 사라지신다.
당나무는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리고 아버지도 지켜봤을 것이다.
장터에서 공치고, 점심도 사 드시고 시골 다방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고 돌아오시는 언덕길은 이제 만만치가 않으시다. 가실 때와는 달리, 자전거에서 내려서 천천히 끌고 오시는 아버지에게 당나무는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준다.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시는 나의 멋진 아버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