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어귀에 작은 집이 있었다. 도롯가 바로 옆에 자리한 그 집은 한동안 비어있다, 택배회사가 들어섰다. 접근성이 좋고, 마당은 큰 택배차량이 들어설 수 있게 기다란 네모꼴이었다. 함석지붕으로 덮인 그 집은 작아서 잠시 머물러기에 번잡하지 않았다. 그러다 작년 여름부터 어떤 사람이 오가기 시작했다. 작은 집은 그 사람의 손길을 거쳐 따뜻하고 운치 있는 집으로 변해갔다. 뚝딱뚝딱, 손기술이 좋은 그는 하늘의 적당한 공간에 아담한 정자를 지어놓고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집 앞을 엄마가 기웃기웃한다. 두 손에는 딸들이 챙겨 보내준 떡이며 빵이며 적당한 핑곗거리들이 들려 있었다.
새벽 일찍부터 시작된 엄마의 아침은 냉기 가득한 부엌을 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전날, 방을 뜨겁게 데웠던 아궁이 속의 회색빛 잿더미를 긁어내고, 새로 군불을 피워냈다. 점차 따뜻한 온기가 퍼져나가고, 식구들이 세수할 뜨거운 물이 가마솥에서 끓고 있다. 시장에서 산 값싼 신발을 신고 여기저기 작은 발이 바삐 움직인다. 장독대에서 된장을 푸고, 뿌리를 묻어놓은 파를 뽑아 온다. 시큼한 김치도 양푼이 가득 꺼내오신다. 다시 창고로 가셔서 감자와 양파를 챙겨 오신다. 석유곤로, 연탄불에 냄비들이 골고루 올려지고, 아궁이 옆 작은 숯불화로에는 생선이 지글지글 구워진다.
그 옛날, 우리 엄마는 워킹맘이셨다. 서너 개의 도시락을 싸 놓고, 아침상을 급하게 물린 뒤, 엄마는 일터로 향하셨다. 북적대고 소란스러웠던 조금 전 집안 풍경은 아득히 밀려난다. 저 너머 산의 뻐꾸기도 풀벌레도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태양은 따뜻하면서도 뜨겁게 주인공을 비춰주고 있다. 거기에는 호미로 자꾸만 흙을 만져대는 엄마가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엄마의 순하디 순한 마음들이 산산이 부서져 잡초의 뿌리마냥 깡그리 벗겨진 채, 흙 위에 내동댕이쳐졌다. 엄마의 일터는 자연이었다. 엄마가 그걸 알아챘든 몰랐든, 곁에 있던 모든 자연이 파도처럼 다가와 엄마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엄마의 뻥 뚫려버린 허전한 마음을 위로해줬다. 남편과의 거친 세월도, 바로 옆에 자리한 시댁 동서의 별난 시집살이도,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길 없는 여섯 명의 자식들 속에서의 힘든 삶을 자연이 알아주었다. 흐트러진 밭고랑을 곱게 세우신 후, 엄마는 다시 하루를 살아가실 수 있었다. 고된 육체의 노동조차도 이겨낼 만큼 강해지셨다.
세수하시고,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곱고 뽀얀 피부에 화장하신다. 작은 화장대 거울은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깨어지고 금이 갔지만, 우리 엄마는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 거울에 비친 엄마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요술 거울이다. 엄마가 긋는 삐뚤삐뚤한 선이 엄마의 새 눈썹이 된다. 엄마의 투박한 손길에 예쁘고 발그란 입술도 생겨난다. 어찌 보면 피에로 화장 같기도 하다. 머릿기름을 바르고, 시골 오일장에서 산 알록달록한 옷들을 꺼내 입으신다. 그 옷은 엄마에게 꼭 맞다. 거울에 고운 우리 엄마가 비친다.
내가 대학생이고 직장인이었던 그 시절의 우리 엄마는 여러 명의 딸에게 차례대로 전화를 거셨다. 그날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마치 독백처럼 오래오래 계속하셨다. 엄마는 외로웠다. 그것도 모른 채, 어떤 날은 퉁명스럽게, 어떤 날은 귀찮은 맘으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마지막에서야 나의 안부를 물으셨다.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했을 그때의 엄마는 잠시 짬이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시고, 드문드문 나는 흰머리에 속상해하셨다. 몸조리를 제대로 못하신 엄마는 오래전부터 틀니를 하셨다. 그리고 얼굴 가득 주름을 만드셨다.
서울에 사는 친척 아재는 일 년에 한 번씩 성묘를 하러 고향에 오신다.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은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아재의 어머니 생각이 나게 한다. 도시의 식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입맛이 다시 살아난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회사 1층에 작은 나무 상자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오곡밥과 가마솥에서 찐 생선, 갓 담근 명란젓갈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다. 보름날 전국에 흩어진 부모님과 여섯 명의 자식들은 같은 밥을 먹었다.
내가 잠시 부모님 댁에 머무를 때, 엄마는 일 년 동안 드실 마늘이 필요했다. 여름이 진행되는 그때는, 수확을 끝낸 마늘이 나올 때였다. 읍내의 큰 오일장에 가서, 엄마를 먼저 내려드리고 볼일을 본 뒤에야 아차, 싶었다. 그곳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모두가 우리 엄마 같아 보였다. 시골 미장원에서 한 짧은 파마머리에, 꽃무늬 옷을 입고, 구부리고 앉아 물건을 팔기도 사기도 하는 모든 분이 우리 엄마였다. 저분들 중에 힘든 삶을 사시지 않은 분들이 과연 있을까? 생각해 본다. 비슷한 듯 다른 그분들 중에 유독 한 분이, 우리 엄마라서 그리고 내가 딸이라서 서로가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시는 그 몸은 자꾸만 작아져가고 가벼워진다. 아마 엄마의 속은 기름때가 하나도 끼지 않은 순수한 깨끗함, 그 자체일 것이다. 엄마가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아마 새처럼 뼈마저도 가벼워져 하늘을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내가 처음 남편 따라 외국에 오게 되었을 때, 엄마는 하루라도 전화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셨다. 그러던 엄마가 이제는 1,2주에 한 번씩 통화해도, 오히려 자주 한다고 고맙다고 하신다. 예전에는 언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거라고 물으셨지만, 이제는 그저 너희 가족 건강하게 지내면 된다, 하신다. 그러면서 "집에 꽃이 가득하다"라고 맑은 음성으로 자랑하신다.
어느 날, 엄마가 나에게 "꽃처럼 살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엄마가 아시는 두 분이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해가 있었다.
쪽문을 사이에 두고 시집살이를 살았던 엄마에게는 손윗동서다. 도시에서의 요양원 생활 7년을 마치시고, 98세의 일기로 설날 전에 돌아가셨다. 마침 그날은 따뜻했다. 아침에는 우연히 바닷가에 사시는 분이 싱싱한 오징어를 많이 가져다줬다고 한다. 맏어메가 오징어를 좋아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덕에 장례식에 모였던 가족들, 여러 친지 그리고 일꾼들은 엄마가 하신 오징어 횟밥을 맛있게 드셨다, 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남는 건 눈물과 슬픔뿐이리라.
그리고 또 한 분, 햇볕이 잘 드는 양지마을에 사셨던 엄마 친구분이시다. 마을회관에 모여 점심도 같이 해 드시고, 민화투도 치고, 뜨끈한 방에 누워서 털레비전도 같이 봤다. 동네 계추가 있대서 곧 오시기로 하셨다는데, 이삼일 있다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연세 드셔서 작아진 우리 엄마의 눈에서는 모진 세월에도 끄떡하지 않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는 꽃을 참 좋아하신다. 꽃이 사람보다 좋다 말씀하신다. 꽃을 보며 좋아하는 그 마음은 잠시지만, 엄마를 행복하게 한다.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삶에는 작고 소소한 것들이 더 위대하다. 순간의 행복이 영원을 말한다.
그런 엄마가 소녀같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웃다 쓰러지는 십 대 소녀처럼 엄마도 매번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고장 난 게 있으면 척척 고쳐도 주고, 참기름을 짜러 다른 동네의 방앗간에도 모셔가 준다.
"자네, 수고했네!" 평생에 걸쳐 이 말 한마디 안 해주는 무뚝뚝하고, 성격 급한 밖에서 잘난 남편의 외출 후, 조용하고도 분주한 엄마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예쁜 분홍 모자 쓰고, 딸이 보내준 고급스러운 목도리를 두르고, 산뜻한 꽃무늬 잠바를 입은 엄마의 외출이 시작된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에 무슨 이유를 댈 수 있을까? 그냥 엄마 마음이 그러한데. 어르신들을 위해 뜨끈한 아랫목을 준비시켜 놓고 주인장은 외출 중이다. 스무 살에 중매로 시집온 엄마가 아마 자유연애를 했다면, 이렇게 순하면서도 손매 야물고, 따뜻하면서도 잘 생긴 사람이었지 아닐까? 혼자 생각하다 그냥 웃는다. 노부부의 가려운 등을 가까이에서 긁어주는 그분의 친절이 그저 고맙다.
내게 꽃화분을 자랑하던 엄마에게 "엄마, 지금 거실에 핀 꽃 중에서 제일 예쁜 꽃은 엄마야"라고 하니, 우리 엄마는 그저 웃기만 하신다. 아무런 부정도 않으신 채. 나에게 꽃처럼 살라고 하셨던 엄마가 꽃이 되었다. 엄마는 남편의 사랑 하나면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었다. 68년을 함께 해 오시면서도, 엄마도 아버지도 바뀌시질 않았다. 하지만 어떤 지혜가 생기셨는지 가끔 두 분이서 함께 웃으신다. 주름진 엄마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