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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Anne Jun 19. 2021

아카시아꽃과 꽁치 젓갈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바다로 불어온다.

자유로웠던 푸른 바다에 꿈속인 듯

달큰한 향기가 찾아오면

유유히 헤엄치다

문득, 고향생각이 난다.


시골의 오일장이 떠들썩하다.

이른 새벽 어부들은 만선의 배로 돌아오고,

아지메들은 펄펄 뛰는 붉은 해를 큰 고무대야에 담아, 파란 바다를 띄워놓는다.

꼬부랑 할머니들의 블라우스에는 색색의 꽃들이 활짝 피어나 있다.

엄마는 손수레에 꽁치 궤짝을 실어오신다.


뒤뜰의 된장, 고추장, 간장 항아리와 떨어진 외딴곳, 앞마당의 응달진 곳에 커다란 젓갈 항아리가 놓여있다.  

햇볕 아래 반짝이는 파란색이 하얀 눈 소금을 만나 아득한 꿈을 기 시작한다.

재봉틀을 굴려 만든 몇 겹의 천을 고무줄로 꽁꽁 싸맨 후, 항아리 뚜껑 위에는 알싸한 제피나무 가지가 올려진다. 파리들이 몰려오다 줄행랑을 치고 만다. 엄마의 평생 자존심이 아직도 꼿꼿하게 지켜는 곳이다.


8월의 늦은 어느 날,

엄마, 아버지는 여름작물들을 수확한 빈 땅에 배추씨를 파종하신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11월이 되면, 그 땅 위에는 속이 꽉 찬 알배기 배추가 가득 자라 있다.


하얀 아카시아꽃이 피던 그때,

바다에는 파란 꽁치가 잡힌다.

배추씨가 자라 한아름이 되면,

항아리에는 소금기 머금은 푸른 바다가 넘실댄다.


엄마가 젓갈 항아리 뚜껑을 드디어 여신다.

김장비닐을 검정 고무줄로 꽁꽁 묶고,

스테인리스 통에 넣어 테이프로 칭칭 감아,

우체국 종이 박스에 담는다.


하늘을 난다.

조금 전까지도 엄마,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닿던 김장박스 하나가, 수천 킬로미터의 낯선 땅에 홀로 도착한다. 지시 없이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세관의 통과가 떨어지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그 먼 길,  

너덜너덜해진 우체국 박스에는 그만 김치 물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붉게 물든 박스를 단단한 플라스틱 박스에 새로 담아 배달해준다. 내가 사는 나라가 그래도 인정이 있구나, 싶어 새삼 참 고맙다. 하지만, 냄새는 못 맡겠는지 회의실에 덩그러니 놓아두었다.


아, 고향의 냄새가 새어 나온다.

나에게는 너무나 그리운 냄새였다.

우체국 종이박스를 뜯고, 스테인리스 통의 테이프들을 벗겨내고, 잔뜩 부풀어 오른 비닐봉지의 검정 고무줄을 다시 푼다.

갓 담근 김장김치가 보름 만에  푹 익어있다.

하얀 쌀밥에 김치를 쭉쭉 찢어 올린다.

뜨거웠던 여름, 불타오르던 고추의 붉은빛은 어느새 옅은 분홍빛으로 눈앞에서 흐려진다.


푸른 동해에는 파란 꽁치가 잡히고,

집 뒤의 산에는 하얀 아카시아꽃이 병풍처럼 둘러싸며, 

기름진 밭에는 곡식들이 앞으로도 풍요롭게 열릴 텐데...


딱 세 번 만이라도 더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아니 그저 그곳에 내 발길이 닿는 날, 거칠어진 손을 마주 잡고 바라만 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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