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by Jane Anne


날씨가 덥다. 하지만 선풍기는 지하창고에 있다. 지하창고는 두 개 문의 열쇠를 갖고 있어야 하고, 미로처럼 꼬여 있다. 나는 그중 하나의 열쇠밖에 없고,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그리고 혹여 안다고 해도 그곳은 문을 열자마자, 곧 맞닥뜨릴 짐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선풍기를 감싼 비닐봉지 두 개를 찾아서 갖고 올 자신이 없다. 이 더위가 그럭저럭 견딜만하다고 생각해 버린다.


거실에는 우리가 갖고 가야 했던 트렁크들이 나뒹굴고 있다. 지금쯤은 잔뜩 부풀어 오른 맘을 부여잡고, 비행기를 타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테스트에서 두 줄이 나와버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했을 땐 기뻐서 날뛰던 순간이었는데, 이번 테스트기는 절대 두 줄이 나오면 안 되는 거였다. 며칠 동안을 겨우 밥만 해결하고는 드러누워 있었다. 아이들이 종일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봐도 제지할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남편이 성(城)에 가자고 한다.

이 사람은 갈 만한 곳이 없을 때면 늘 성(城)에 가자고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갈 곳이 없다는 걸 알기에 따라나선다. 1시간여의 거리,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꾸불꾸불한 좁은 산길로 접어든다. 아들은 차만 타면 잠을 자고, 딸은 차만 타면 안 자고 버틴다.


내가 사는 이 나라는 당시 3만 명의 인구에 180여 개의 작은 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은 수의 성이 황폐화되었다. 중세부터 18세기까지 헝가리 왕국들이 방어를 위해 지었다, 군사적 목적이 감소하고, 좀 더 편안한 주거지를 찾게 되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일부 마을 사람들이 성의 돌을 빼와 자기 집을 짓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나는 약 15개의 성을 다녀본 것 같다. 대충 성이 어떠한지는 알고 있으나 가는 여정과 산세, 고유의 정취, 부드럽고 따뜻해진 돌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성 위에서의 전망이 매번 성을 찾아가는 이유를 만들어 준다. 아슬아슬 비탈진 곳에 서서 아래를 훤히 내려다보면, 주위를 둘러싼 깊은 산들이 보이고, 마을이 보이고, 때로는 강줄기가 있어 아찔한 바람까지 곁들여주면, 낙석의 위험이 붙은 표지판 앞에선 다리가 후들거리면서도 가슴이 시원하게 뻥 뚫린다.


이곳은 동양인들이 거의 안 오나 보다. 차 안에서 주차할 공간을 찾고 있는데도 바라보는 시선들에 왠지 머쓱해진다. 10여분을 올라가니 매표소가 있다. 보통은 무료인데, 2유로의 입장료를 받는다. 하지만 성안은 온통 재건을 위한 건축자재들로 쌓여있다. 내가 낸 입장료는 재건에 쓰이는가 보다. 조금 들어가니 부실해 보이는 철제 다리가 바위산에 박혀있다. 그 위로는 다시 벼랑을 깎아 만든 아찔한 80개의 계단이 있다고 한다. 몇 번 시도하다 나만 못 올라가고 만다. 그동안 무료로 본 성들에 감사하며 아무것도 안 봐도 괜찮다.



햇살이 따가운 여름 오후, 청동색 성당 첨탑이 솟아 있고 마을은 고요하다. 성당 뒷마당에는 누군가가 그늘에서 누워 자고, 개 한 마리는 우리를 힐끗거리며 자기 갈 길을 가 버린다. 틴에이저로 보이는 여자아이들 네, 다섯 명은 말라버린 도랑가에서 낮은 어조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주차할 때 봤던 남과 여는 버스정류장에서 자리를 옮겨 마을 약수터에 앉아있다.


화려한 간판, 복잡한 소음, 매캐한 공기, 사치는 아니더라도 유욕을 불러일으키는 예쁜 물건, 묻어뒀던 기억을 자극하는 익숙한 음식 냄새...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차들은 경적을 울려댄다. 나는 산업화된 그 나라가, 도시들이 너무 그리웠다.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어쩌자고 더 깊은 산속의 조용한 마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목을 축이기 위해 주차하면서 봤던 식당에 찾아갔다. 몇몇 테이블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우수수, 쏟아지는 시선들..."도브리 덴" 먼저 인사를 해 버린다. 그랬더니 시선들을 거두어 가고, 본인들의 대화로 돌아간다. 바로 옆 테이블에 마음 편하게 앉았다.

남편과 애들이 주문하러 들어갔다. 잠시 뒤, 아이들은 뽑기 기계에서 장난감을 뽑아서는 신나서 달려 나오고, 남편은 맥주와 깨끗한 컵을 들고 나온다. 생수는 옆의 약수터에서 떠먹으라고 한다. 약수를 담아 오니 컵은 더욱 청량해 보인다.

그리고 맥주는 내가 좋아하는 달걀찜 맥주이다.

원래 맥주를 주문하면, 한 번에 재빨리 따르고는 거품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3,4번을 그 과정을 반복해서 준다. 그러면 거품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달걀찜처럼 예쁘게 부풀어올라 쫀득쫀득해진다. 거품맛이 쌉쌀하게 씹히는 느낌이다. 그런데 물보다 싼 맥주가 최근에는 1유로대에서 3유로대로 훌쩍 올랐다. 종업원은 단 한번 쭈르르 따르고는 잽싸게 갖다 준다. 컵의 반이 날아간다. 인정 없어진 맥주가 이곳에서는 아직 달걀찜처럼 부풀어올라 있다.

이제 우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동네 꼬마들은 강아지와 우리 앞에서 놀고 있다.



산속의 길은 커브길에 울퉁불퉁하기까지 하다. 조그만 자극에도 아이들은 놀이동산 같다며 웃어대고, 신나 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은 심심했나 보다.

어쩌면 그 마을 사람들은 삼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떠온 약수가 며칠 동안 맑고 깨끗하다.

남편은 선풍기를 꺼내오고, 짐가방들은 작은 방에 테트리스처럼 쌓아놓고, 나는 마음을 더해 밥을 짓는다. 그리고 다시, 3년 만에 가는 곳을 설레며 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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