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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May 11. 2021

제주에서의 일기

시공간을 벗어난 것 같은, 느리게 가는 시간

제주다. 퇴사를 하고 제주를 왔다. 어제 도착한 다음 유명한 고사리 육개장을 먹고, 오늘 첫 아침을 밝혔다. 아는 분이 제주에 사셔서 얼마나 머무를지 기한도 정하지 않고 왔는데, 내 짐을 보면 한달살이를 하러 온 사람처럼 짐이 한가득이다. 마음으로는 그만큼이나 있고 싶었던 걸까. 

오늘은 꾸역꾸역 8시까지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그 자리에 앉아 나를 머무르게 해 주신 부부, 그리고 이곳에 또 한 달을 살러 온 한 살 많은 언니와 함께 1시간은 넘게 이야기했다. 초면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함께 얼마간의 시간을 함께 머무르며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언니가 생겼다. 

늘 긴장감을 주는 일하는 곳인 서울, 그리고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편으로는 마음의 짐도 지게 되는 양산을 떠나서 떠나온 제주. 이곳에서의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제와 오늘 사이에도 많은 것을 배웠다. 

낯선 타인을 향해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나의 잘난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연스러운 모습을 원하는 사람, 자신들이 누군가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은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는 세상에 익숙해진 나, 무엇인가로 인정받아야만 될 것 같은 압박을 주는 세상에 익숙해진 나에게 너무나도 낯설고 생경한 풍경들이 한가득이지만 이 시간을 경험하면서 나도 살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환대와 우정, 낯선이들을 반기고 품고 이유 없이 나눠주고 또 베푸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삶의 모델을 가까이서 경험하고 보는 것이 살면서 흔치 않은 경험이기에. 잘 받아먹고 누리고 배워서 또 내 삶으로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오늘의 이슈는 흐린 제주 하늘 아래에서 처음 상추와 깻잎을 심었던 것인데, 쉽게 돈 주고 사 먹는 그 상추가 그만큼 자라는데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들어간다는 것을 오늘 몸소 배웠다. 그리고 꽤나 신선했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정말 상추를 잘 심는다는 것 이외에 아무 생각이 안 드는 시간이랄까. 그리고 밭 곳곳에 심겨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진짜 가지각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이런 풍경들에 관심을 갖지 않고 그리도 정신없이 회색도시에서 살아갔던 건지. 그 어느 때보다 제주의 풍경을 만끽하고 가야겠다. 그리고 다음 이슈는 오늘 처음 보는 언니와 함께 제주의 금능해수욕장과 협재 해수욕장을 잠시 보고 스타벅스에서 당신과 나의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물론 또 주제넘게 언니한테 나의 생각과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게 아닐까. 듣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끄악!) 여행이 주는 맛이 아닐까. 낯선 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낯선 곳에서 맺게 되는 새로운 인연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될 수 있는 시간, 여행. 좋은 친구로 남게 되길 바란다. 모든 인연은 버릴 것이 없기에. (물론, 악연 말고!) 

앞으로 며칠을 더 있을지 모르겠다. 일주일이 될지도, 이주일이 될지도 모르겠고, 어쩌면 정말 한 달을 머물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얼마간 있든지 간에 마음의 무게와 짐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누리고 쉬었다가 가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충분히 쉼이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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