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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Jun 06. 2021

굳이 말이 필요없던 어느 날

아름다웠던, 제주의 노을진 저녁

제주에서 머문지 3주를 지나 4주차였던 지난주는 시간이 조금 더디게 갔다. 집을 떠나와 제주에 머문 지 어느 덧 한달이 되어가면서 이곳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조금 익숙해져서일까. 하루하루가 참 길고 느리게 갔다. 특별히 하는 것도 없었고, 뚜벅이인 나는 집 밖을 나가려면 함께사는 언니나 부부의 도움을 받아야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멀리 벗어날 수도 없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고, 택시도 드문 곳이라 더욱 더 그렇다.) 사실 언제든 부탁하라고 하지만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그냥 근처 바닷가에 내려달라고 하고 걷고, 카페를 가며 시간을 보났다. 

그런데 제주의 금능과 협재해수욕장 근처에서 차타고 15분 거리에 살고 있어서 차로 오고 가며 매일 같이 보는게 바다 인터라 잠시 그렇게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은 늘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어 하는 나에게 늘 고역이기 때문에 어쨌든 나와서 머물다가 들어갔다. 바다를 좋아해서 매일 같은 바다라도 또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조용하게 일주일이 흘러가려던 찰나, 6월 4일 금요일 집 밖을 나섰다. 일주일에 한 번 제주 동쪽에 있는 아쿠아리움 플레닛 연간회원권을 끊고 다니고 있는 언니를 따라 나서서 성산일출봉 근처에 있는 '오른' 이라는 카페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 언니가 4시간 정도 아쿠아리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도 카페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와 통화를 하고,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지금 나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를 생각하는데 답이 안 나와 그냥 생각하기를 또 멈추고. 밖에 나가서 풍경을 보며 사진과 영상을 담고 그렇게 킬링타임을 했다. 사실은 이 날의 풍경을 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바다를 마주한 제주의 하늘과 바다가 말이 안되게 아름다웠던 날이었기에.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만난 우리는 제주 수제버거를 먹으러 한림 바닷가로 향했다. 세화와 김녕해수욕장을 낀 해안도로를 타고 달려 함덕 해수욕장 근처에 있는 무거버거를 먹으러 갔다. 그런데 버거를 먹는 순간에도 주인공은 하늘이었다. 버거를 먹으면서도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감상할만큼 아름다웠다. 하늘의 푸르름이 바다의 푸르름을 이겼다고 할까. 제주의 바다를 이겼으니, 이날의 하늘은 말을 안 해도 다했지 뭐. 

그렇게 수제버거를 30분도 안돼서 클리어하고, 서쪽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장장 2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왕복해서 운전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운전을 못하는 나는 그저 엄청 피곤할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 얼마나 힘들지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체력적으로 쉽지 않다는 걸 생각해서 옆에서 열심히 bgm을 바꿔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나는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하하하)

그런데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노을 풍경에 있었다. 내가 여행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어떤 장소와 풍경을 보러 가는 순간들보다도 길 위의 시간들인데, 특히나 붉은 노을이 낀 도로 위를 달리는 것을 참 좋아한다. 적절한 노래를 배경으로 삼아 노을을 감상하는 순간들은 수년이 지나도 오래 기억이 남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 

6월 4일의 하늘, 정말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리던(?)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 눈 앞에 펼쳐진 노을의 풍경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고, 이 날의 노을은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만큼이나 진하고 깊었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짙은 노을에 함께 가던 언니는 고맙게도 차를 멈춰 세워주었고. 나는 그 덕에 30분 가까이 노을을 감상하고 돌아왔다. 

이 풍경 앞에서 지난 일주일의 무료하고 평범했던 시간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 무료함이 있었기에 (너무 미화하는 걸까) 이 시간의 특별함이 더욱더 반가웠던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늘에게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간을 누리기 위해 차를 멈춰 세워준 언니에게 고마웠고. 

한참을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다 이 노을을 마주하며 계속해서 집으로 달렸다. 집으로 오는 끝까지 노을빛은 하늘을 덮었고, 그 덕에 더 짙어지는 하늘 아래를 달리며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이렇듯,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뜻한 즐거움을 발견한다. 특히나 자연의 영역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이런 순간이 오면 정말 큰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할까. 그리고 복잡했던 마음과 생각들이 가라앉고 잠시나마 평화로웠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이 날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았을 때 기억하지 않으면 그냥 휘발되어 날아갈 것 같아서, 언젠가 꺼내보고 싶은 날의 기억일 것 같아서 이렇게 남긴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그런 하늘이었다. 제주를 떠나기전에 다시 보고 싶은 하늘, 행복하고 황홀했던 어느 날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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