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2016
스페인에서 쓰는 첫 번째 여행 일기.
뜬금없이 가게 된 두 번째 유럽에 나의 계획력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잦은 여행 탓인지 너무 갑작스러워서 인지 첫 유럽보다는 큰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프랑스 같기도 하고 이탈리아 같기도 하고, 호주 같기도 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애매모호했던 첫 느낌들은 그곳의 골목을 헤매면서 거품처럼 사라졌고, 뜻하지 않게 즐기게 된 메르세 축제에서 만난 각국의 소중한 인연들은 나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줬다. 그렇게 난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스페인에 스며들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말라가를 거쳐 네르하로 넘어가는 날,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자 사고가 빈번히 난다는 라이언에어를 탄 탑승객들은 모두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비행기를 타고 고속버스를 타고 걷고 걸어 네르하에 도착했다.
쨍한 빛에 무거운 가방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고 이제는 꺼내도 되겠다 싶어 몇 개 안 되는 아껴뒀던 컵라면을 뜯었다. 커피포트도 주전자도 없던 도미토리에서 난 스태프에게 뜨거운 물을 부탁했지만 그녀는 미적지근한 물을 컵라면에 넣었고, 그 바람에 내 라면은 차가운 라면이 돼버렸다. 당황한 나의 표정을 본 그녀는 미안한 마음에 숙소 밖 식당까지 가 물을 다시 끓여다 주었고 난 그 덕분에 극적으로 정말 맛있는 첫 라면을 먹기도 했다.
숙소 앞 이름 모를 바다의 해 질 녘은 나를 두 시간 반 동안이나 멍을 때리게 만들었고, 스페인의 산토리니라고 불리는 프리힐리아나는 그저 꽃 같았다.
그라나다로 넘어가는 버스 안인 지금.
꽃 같은 순간들을 포착한 필름이 끊어졌던, 유심을 재구매하려다 마지막 밤의 해 질 녘을 보지 못 했던, 유심이 폰에 먹히질 않아 24유로를 공중에 분해시켰던 어제의 일들이 버스 안에서 보는 창밖의 풍경들의 경이로움으로 하여금 미화되어 더 이상 여행지에서의 불행이 아닌 그저 필름처럼 빛바랜 추억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
여행이 더 깊게 와 닿는 이유는 여행 속의 모든 힘들었다고 생각한 해프닝들이 마치 옛날 일처럼, 낡은 필름의 추억으로 또 기억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마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일들도 그저 '그때 그랬지'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