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giliana, Spain
네르하에 도착하면 짐만 풀고 프리힐리아나로 꼭 넘어가겠다던 굳은 다짐은 저 멀리한 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컵라면을 뜯었다. 적은 예산으로 인해 바르셀로나에선 하루 종일 빵만 먹어도 라면은 아껴먹겠다며 절대 안 뜯었는데, 친구가 보내온 떡볶이 사진을 본 순간 굳건했던 모든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숙소에 도착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한 듯 컵라면을 뜯었다. 유난히 영어를 못하던 숙소의 스탭은 무슨 일이든 본인이 도와주겠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나의 손을 무시하곤 컵라면을 가져갔고 내가 애지중지 아꼈던 컵라면에는 찬물이 담겨왔다. 너무나도 이쁘게 웃으면서 컵라면을 건네주는 그녀에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내 컵라면을 버릴 순 없으니 번역기를 돌려가며 다시 천천히 설명을 하자 연신 사과를 하며 내 컵라면을 다시 가져갔다. 저녁은 뭘로 때울지 또 다음날 프리힐리아나로는 어떻게 넘어갈지 고민을 하며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데 내 컵라면과 맥주 하나를 들곤 미안한 얼굴로 다가오는 숙소 스태프가 보였다. 따뜻한 컵라면과 맥주 하나 들고 있는 그 친구를 보고 왠지 이 도시 많은 이야기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 그렇게 고대하던 프리힐리아나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길거리로 나서자 바람을 타고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골목길 빵가게의 버터 냄새에 식욕의 솟아오름을 참지 못하고 빵을 하나 들고 버스에 올라탔다. 맑은 하늘도 뜨끈한 크루아상도 내 벚이 되기에는 정말이지 충분했다. 그렇게 삼십 분쯤 달렸을까 굽이진 길들을 달리고 달려 버스에서 내리자 하얀 하늘의 이쁜 동네와 마주했다.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뜬 하늘이면 얼마나 좋았겠냐만은 결국엔 드디어 와버린 이 도시를 보고 있자니 그저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내가 늦잠을 자지 않은 것도 차를 놓치지 않은 것도 버스에 자리가 있던 것도 그저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꽤 마음에 드는 추억들을 남기고 있는데 먹구름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아침엔 흰구름들이 파란 하늘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래도 비는 안 오는구나 라며 한숨 돌리기 무섭게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두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밥시간을 인지한 내 배꼽시계가 마구 울렸고 식당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밥을 다 먹고 다시 네르하로 넘어가 해 질 녘의 바다를 바라보면 아주 완벽한 하루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필름을 교체하려는데 어쩐 일인지 필름 덮개가 열리지 않았다. 분명 36장 전부 잘 쓰고 레버 돌리는데도 문제가 없었는데 불안한 마음과 초조한 마음이 쉴 새 없이 밀려왔지만 필름을 갈지 않을 수도 없었다.
쉴 새 없이 피어오르는 겁을 꼭꼭 눌러 담아 꽤 큰 결심을 하고 뚜껑을 열려는 찰나 맥주와 새우 감바스가 나왔다. 식탁보와 너무 잘 어울리는 접시와 함께, 뚜껑을 열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라는 생각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뚜껑을 열었다. ‘탁’ 작은 걸림과 함께 필름의 걸림이 느껴졌다. 오초 동안의 정적 이후에 깨달았다. 오전 내내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이 모조리 찢어졌고 나의 순간들도 모두 흩어졌다. 그냥 멍하니 필름만 쳐다보다가 실성한 듯 웃음을 지었다. 순간 가슴이 주저앉았지만 이미 벌어진 별 수없는 일이었다. 우울한 마음을 대낮의 맥주와 감바스로 달래기엔 너무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와중에 맛있음을 느끼는 내 미각이 미웠다.
밥을 먹으며 생각해보니 네르하의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답겠지만 그 아름다운 바다를 이틀은 족히 봐도 모자랄 거라고 생각했지만 프리힐리아나의 깨끗함과 고요함을 담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한참을 고민에 빠져 있어서였을까 자리에 일어나려던 찰나 아침내 껴있던 흰 먹구름들이 거짓처럼 사라져 있었고 햇살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햇살이 해준 위로받은 기분에 네르하의 바다는 내일을 기약하고 이곳을 좀 더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밥을 먹고 자리를 일어서려는데 식당에 들어올 때 눈인사를 한 웨이터와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의 친절함에 그리고 미소에 감사인사를 하고 길을 나서려는데 그가 열심히 눈썹으로 내 카메라를 가리키고 있었다. 찍어달라는 의미인가 싶어 카메라를 들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 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담았다. 꽃같이 웃고 있는 그가 프리힐리아나는 이제 내게 꽃으로 다가갈 거라며 얘기해주는 듯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나는 하루에 두 번 여행을 했다.
내가 지내온 여행의 순간 중 그렇게나 따스히 마음이 사르르 녹여준 순간을 꼽으라면 지금 이 순간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