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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걱정은 넣어둘게.

Bogor,Indonesia

by 느림주의자

너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곳에 머물러 꽃을 피우고 너의 색을 바꾸고 너의 일부를 떨어뜨리며 다시 태어나 그렇게 우둑하니 너의 자리를 지켰니, 그동안 이렇게나 이쁜 너를 보려고 얼마나 돌고 돌아 이곳에 온 걸까, 나는 왜 네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꼭 일 년 만의 푸르름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나무를 좋아하는데 나는 왜 우리나라에 있는 서울숲조차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못하고 있었는지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동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 오래 머물고 싶으면서도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내가 한 번 더 바보 같았다.


보골 그러니까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거리 즈음 떨어져 있는 이곳은 1700년도 식민지 시절 네덜란드인이 세운 도시이며 인도네시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이다.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꽤 좋은 날씨 환경 덕분에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실제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며 인도네시안들은 이곳을 나무의 도시 또는 비의 도시라고 부른다.

제일 지대가 높은 덕에 선선한 바람이 자주 불어와 실제 내가 여행했을 당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뜨거운 공기가 적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고 우기가 되면 지대가 낮은 자카르타의 경우엔 물이 넘쳐 도시가 잠기는 일이 빈번하다고 했는데 보골은 그런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꽤 자주 내리는 비 덕에 식물들이 우렁차게 자라나기 때문에 그 나무들로 하여금 낮시간 여행을 할 때 그늘에 잠시 쉬어가기도 하며 찬찬히 도시를 바라볼 수도 있는 게 제일 좋았다. 햇빛과 나무를 좋아하는 내게 보골은 동화 속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들어가고 싶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난 친구에게 나무의 도시 그리고 비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곳에 어마 무시하게 큰 보타닉 가든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의 두 눈은 반짝였다.

사실 내가 혼자만의 여행에 빠진 계기중 하나가 자연이다. 시끌벅적한 서울을 떠나 혼자 여행을 하게 될 때면 항상 나의 마음과 자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다 위에 떠있는 윤슬의 반짝거림을 나뭇잎 새로 들어오는 햇살의 눈부심을 형형색색 피어나는 꽃들의 아쉬움을 자연의 향기를 소리를 나는 여행을 하고서야 자연의 가치를 알게 됐고 여행에서 돌아오면 피크닉 매트를 챙겨 한강공원에 가 종일 누워있곤 했으며 자연을 더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내게 보골은 눈과 귀 그리고 코도 너무 편안한 여행지임에 틀림없었다. 신기하게 생긴 나무,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을 만큼 우렁찬 나무, 여기저기 피어져 있는 들꽃, 새가 지저귀는 소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소리, 풀 냄새, 꽃 냄새, 나무 냄새, 비 냄새 이 모든 것들이 푸르렀고 빛이 났다.

인도네시아는 정말 많은 종교가 있고 인도네시안들은 미신을 정말 잘 믿는다고 했다. 바람의 신 , 물의 신, 나무의 신 등등 자연을 ‘신’화 시켜 바라보는 이 나라에 와서 다 보려면 하루도 더 걸린다는 그 나라의 보타닉 가든은 잠깐이라도 무조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외국인 친구와의 만찬이 보타닉 가든 안의 식당에서 있었고 나는 잔뜩 들뜬 기분으로 그곳에 향했다. 사실 그날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는데 내가 밥을 먹었던 곳도 커피를 마셨던 곳도 산책을 했던 곳도 모두 보타닉 가든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꽤 놀랐다. 분명 나는 모든 곳을 차를 타고 꽤 이동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동했던 모든 길들도 전부 보타닉 가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타닉가든의 크기를 찾아보았고 110헥타르 그러니까 110만 제곱미터의 위엄을 그제야 실감했다.

만찬에 도착한 뒤 이곳의 말이라고는 감사 인사밖에 모르는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동남아 음식을 못 먹는 탓에 난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하는 바보가 된 저녁이 돼버려 속이 상했다. 누군가에게 신경이 쓰이는 것도 여행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놓고 어우러지지 못하는 나도 부끄러워져 버렸다. 속상했던 내가 눈에 띄었는지 ‘네가 이상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처음이라 이상한 거야’라며 나를 수시로 달래주던 친구에게 파묻혀 울고 싶기도 했다. 숙소에 돌아가는 길, 친구의 차는 좋은 차였지만 울퉁불퉁한 길 탓에 덜컹거리는 차 안의 손잡이를 잡지 않고 그대로 몸을 들썩거렸다. 느지막한 시간 속 보골의 하늘은 그림 그 자체였다. 반대색인 파란색과 빨간색이 어쩜 저리 잘 어우러질 수 있는 건지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다 친구 몰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가만 서서 바라보고 싶은 이 풍경을 지나치는 것 또한 너무 속이 상했다.

제멋대로 자란 나무에게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인도네시아가 후진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며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곳에 와서 그들을 바라보니 그런 말을 한 사람에게 아무 느낌을 느끼지 못한 내가 한없이 창피했다. 배울 점이 너무나 많았다. 제멋대로 자라는 나무들을 더 잘 자라라며 큰 보호대를 쳐 주는 것, 길을 막고 있는 나무들을 해치지 않고 또 다른 길을 만드는 것, 자연을 자연답게 두는 것, 확실히 뇌리에 새겨야 하는 것들이었다.

오랜만에 혼자 싱글벙글 노래를 들으며 걸었던 보타닉 가든의 이른 오후도 빨간빛이 어우러졌던 이곳의 저녁 하늘도 늦은 밤이 되니 너무도 눈에 선했다. 숙소에 돌아와 소파에 몸을 기대어 가만히 책을 읽다 이렇게 글을 쓰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펑펑 울어버렸다. 속이 시원했다. 선바람이 분다. 책을 내려두고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바람에 흩어지는 풀잎의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었다. 온몸에 실어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잔디밭에 뒹구는 상상을 해본다. 나는 자연으로부터 왔으니까, 그렇게 다시 돌아가 어우러지는 모습을 기대치 않았던 보골의 두 번째 날이 이렇게 흐르고 있었다. 붙잡고 싶다.


June,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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