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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바다

May,2018

by 느림주의자

나는 항상 여행지에선 이리저리 헤맸고 두발엔 물집과 굳은살 투성이었다.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기도 했고 기차를 놓치기도 했고 그러다 골목길 틈새가 이뻐 그 틈새를 여행하기도 하는 그런 여행을 해왔다. 그런 내가 여행으로 알게 된 인연으로 현지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아주 편안하게 차를 통해 이동을 하게 되었다. 더위를 피할 수도 있고 무거운 배낭을 긴 시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내게 너무도 편안한 점들이 많았지만 작은 것들을 볼 수 없다는 건 조금 아쉬운 점이기도 했다. 예로 들면 골목의 펍이나 누군가 정성스레 키웠을 작은 화분 같은 것들 말이다.


2018년 5월 26일의 나열
지인의 결혼식을 앞두고 괜히 마음이 쓰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내 결혼식도 아닌데 괜한 걱정이 들었다. 큰 창문 커튼 새로 떠있는 약간의 먹구름을 보니 오늘 처음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는데 비가 오는 건 아니겠지 하고 날씨 걱정마저 들었다. 조식을 먹었다. 해왔던 여행과 달리 호화로운 여행이 분명했다. 널찍한 침대가 있는 방을 혼자 이용했고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많은 음식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많은 음식들을 두고 지난 여행에서처럼 시리얼만 먹고 있었다.

엊저녁에 들었던 그의 걱정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제일 불편한 점이 뭐냐는 지인의 질문에 같이 현지식을 못 먹어서 미안한 마음이 불편함으로 마음에 남는다고 말했다. 사실 여행을 사랑하는 내게 가장 큰 취약점은 현지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태까지 여행을 하면서 현지식을 못 먹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 그래서 음식은 내 여행 경비에 큰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다. 음식이 잘 맞지 않는 나라에선 보통 맥주나 빵 같은 것들로 배를 채워왔고 그 이야기를 꺼내니 그는 그게 무슨 영양소가 있냐며 여행을 하려면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는 끝내 제대로 배를 채우지 못하는 나를 보더니 뭉클한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발리에 왔으니 발리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는 그의 말에 갑자기 쓴 물이 올라왔지만 음식 설명을 들으니 꽤나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비 굴링’ 종교적 영향으로 인해 인도네시아 발리섬에서만 먹을 수 있는 발리 고유의 음식이다. 아기 통돼지 구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듣자마자 발리 여행을 하면서 꼭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식을 먹고 나오니 조금은 걱정이었던 먹구름 덩어리는 어느샌가 저 멀리 흩어지고 사라졌다. 정말 푸른 하늘 밑을 달리고 달려 발리에서 제일 오래된 비치인 ‘sanur beach’에 도착했다. 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방심하고 있던 더위가 나를 덮쳤다. 발리는 4월을 시작으로 겨울이 되기 직전까지 건기가 지속되는데 5월의 발리는 건기가 시작하는 시점이다. 다른 동남아 국가와 다르게 우기와 건기가 반대인 이 곳은 우리나라 여름 성수기 때 가장 여행하기 좋은 동남아시아 중 한 곳이라고 했다. 곳곳에 늘어져있는 서핑보드와 수영복을 입고 바닷물에 뛰어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을 보니 숙소 가방에 들어있는 수영복이 눈에 아른거렸다. 한국에서는 요즘 좀처럼 보기 힘든 파랗고 파란 하늘 밑에 더 푸른 바닷물 그리고 꽤나 하얀 백사장, 저 멀리 보이는 정자도 여행의 시작이 꽤 좋을 거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를 든 그의 모습에 습관처럼 헤벌쭉하고 웃어버렸다. 십 분 정도 머물렀을까 휘몰아치는 더위에 그에게 찍힌 웃긴 사진을 보다 양껏 웃고는 결혼식을 핑계 삼아 차에 올라탔다. sanur beach는 저녁이 되면 푸드 트럭도 열고 맥주를 마시기 딱 좋은 낮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라는 말을 전해 들었는데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해가 진 저녁에 한 번 더 와야 한다고 나 혼자 약속을 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지인의 결혼식이 있는 울루와트에 도착했다. 누군가 샀지만 나라에게 빼앗겼다는 한 도시 정도 되는 아주 큰 빌리지를 스쳤다. 울루와트는 굉장히 부자동네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겉보기에도 번지르르한 건물들과 빌리지들이 꽤나 많았다. 소문처럼 이곳은 정말 이렇게나 빈부격차가 심한데 이 곳에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본인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고 무슨 마음이 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마 무시한 곳을 지나 요즈음 유러피안 사이에 핫해지고 있다는 빠당빠당 비치를 지나 굽이진 곳을 한참을 달려 결혼식이 있는 빌리지에서 지인과 헤어졌다. 오는 내내 연신 내 걱정을 하는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킬만한 방법이 딱히 없어 웃어 보이기만 했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혼자 내버려 두려는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 또한 들었다.

빠당빠당 비치.

빠당빠당 비치에 가고 싶기도 했지만 조용한 바다와 마주하고 싶기도 했고 출입료를 받는다는 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짐바란 비치에 도착했다. 그간 들렀던 바다 중에서 아주 깨끗하고 조용했던 그곳에서는 이렇다 할 소리를 내기도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혼자만의 바다였다. 그때의 짐바란은,

바닷가를 돌다 고픈배를 달래려 도착한 식당에서 또 일본인이냐는 소리를 들었다. 벌써 인도네시아에서만 네 번째 듣는 그 말 또한 내게 많은 생각을 가져다줬다. 이곳뿐만 아니었다. 대만을 갔을 때도 베트남을 갔을 때도 유럽을 갔을 때도 미국을 갔을 때도 혼자 여행을 할 때면 항상 그들은 내게 일본인이냐는 질문 이후 중국인이냐고 묻곤 ‘아 꼬레아-‘라며 답을 내렸다.

용감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나의 생각이 누구에게나 닿길 바래서 쓰기 시작한 글과 찍기 시작한 사진이다. 그것들이 이런 일들 때문에라도 훗날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내길 소망한다. 또한 혼자 당당히 또 자유롭게 여행하는 동양여성이 일본인일 거라는 안일한 생각들도 좀 져버리길 바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마주한 짐바란 비치는 식사를 하기 전보다는 시끌벅적했다. 바닷가에 쭉 늘어선 식당에는 아까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맥주 한잔을 하며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고 끝내주는 해 질 녘과 함께 분홍빛 선하늘이 바닷물에 그대로 비춰 바다가 하늘인지 하늘이 바다인지 헷갈리고 싶을 정도로 그림 같았다. 심술궂다는 발리의 날씨는 전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심술궂은 날씨에게 거참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연인들이 가족들이 바닷길을 거닌다. 저 멀리 옥수수를 한수레 끌고 와 갈릭버터와 치즈가루를 뿌려 옥수수를 파는 아저씨도 보인다. 주저하지 않고 사 먹은 그 옥수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조그마한 아이들이 자기보다 훨씬 큰 보드를 타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데 성공하는 이는 한 명도 볼 수가 없다. 실패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살 수만 있다면 한수레 사서 내 마음속에 집어넣을 텐데 여행을 시작하게 된 호주에서부터 여직 보드를 도전해보지 못한 내가 좀 바보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곳을 보고 있자니 있지도 않은 연인이 떠오른다. 엄마가 옆에 있었다면 끝내준다며 사진을 찍었겠고 아빠라면 이 바다를 그냥 바라봤겠지, 동생은.. 어떠했을지 모르겠다. 워낙 읽기 어려운 녀석이라.

이곳에 계속 계속 머물다 해가 다 져버리면 등불과 달빛만이 남아있는 바다에 어쿠스틱 기타를 하나 들고 공연하는 이들이 있었으면 했다. 볼 수 없어서 더 보고 싶은 멈췄으면 하는 순간이 나도 모르게 흘러가 버려서 더 아쉬움이 남는다. 이쁜 장면을 따라 걷다 멈춰 섰다. 다섯 살이 채 안돼 보이는 아이가 내게 다가와 돌을 들고 중얼중얼. 이 돌을 사라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가 돌을 모아놓는 자리에 내가 서있었다. 미안했다. 또 그런 색안경 낀 마음으로 그 아이의 순수함을 바라봐서. 미안한 마음에 그 아이를 담았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다. 뒤로하고 싶지 않은 곳을 별수 없이 뒤로하고 떠났다. 이렇게나 아쉬우니 분명 난 스쿠터에 보드를 달고 또 이곳에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이곳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처럼.

시발점이 궁금한 구름들이 검은 하늘을 유영한다. 놀랄 정도로 밝은 달빛을 지나 또 어디론가 향하는 구름들이 부럽기도 하다. 영상으로 유영하는 구름들을 담을까 하다 부질없음을 느껴 내 눈으로만 담았다. 아마 내 앞에 지인들이 없었다면 눈물을 흘렸을 것 같기도 했다. 이유 없는 눈물을 좋아하니까,

이렇게나 놀라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울어야 마땅하니까. 오늘 하루의 모두가 좋았다. 끝내주는 사진을 찍어 깔깔대며 웃을 수 있는 추억이 있어서, 나와 함께라서 좋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주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있어서, 멈췄으면 하는 순간이 있어서, 그 순간 덕에 내가 또 미래를 그리고 싶어 져서,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하늘로 하루를 마무리해서, 그런 내가 여기 있어줘서, 그래서 오늘 발리에서 하루의 모두가 좋았다.

어느덧 와있는 발리였다. 발리에 오면 하루 종일 바닷가만 쳐다보고 싶었는데 오늘 같은 날을 그렇게 그리고 그렸는데 파도가 머무는 모래 위에 아이들도, 아이들이 쌓고 있는 모래성도, 바람에 일렁여 부서지는 노을빛도 전부 아쉬웠다. 꿈처럼 자고 일어나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앞에 놓여있는 이 모든 것들이 벌써부터 그리웠다. 짓궂을법한 하늘도 날씨도 내게 행운처럼 다가와 함께 있으면 더욱 좋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떠오르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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