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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su Jul 08. 2021

슈퍼우먼을 이렇게 되는 걸까?

21.02.22

내가 생각했을 때 올레길의 매력은 시작점과 도착점이 만나는 것에서 있다. 겨우겨우 걸어 한 코스가 끝나면 또 다른 시작점에 내가 있고 그 지점에서는 지난날의 추억과 다가올 날들에 대한 궁금함이 항상 함께 있었다.


한라산과 맞바꾼 올레길 5번 코스. 감히 비교가 되겠느냐만 지금의 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에 크게 후회는 없었다. 올레길에는 안내소가 있다. 안내소의 크기마다 다르지만 지도나 굿즈는 기본적으로 구비가 돼있는데 올레시장 쪽에는 게스트하우스나 펍이 함께 있을 정도로 큰 곳도 있다. 안내소는 각 코스의 시작점과 도착점에 있는데 2번 코스의 시작점 안내소가 1번 코스의 도착점이 되기도 해서 며칠 전에 4코스를 걸었던 우리는 5코스의 안내소를 이틀 만에 다시 만났다. 안내소가 우리를 알아보는 것도 아닌데 괜한 반가움에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그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_올레길 5번 코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로 꼽히는 큰엉 경승지 산책길을 시작으로 내륙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길 위에 생각보다 큰 동백꽃 군락지를 볼 수 있고 그 길이 6코스의 시작인 쇠소깍 다리까지 이어진다. 13.4km로 우리가 걸었던 길 중에는 보통 거리의 길에 속하는데 내가 좋아했던 6번 코스와 비슷한 경로로 돼있었고, 동백꽃이 이쁘게 피어나는 2월 중순부터 3월인 지금 시점에 오면 아주 이쁜 동백꽃 군락지를 구경할 수 있다.

_제주의 남쪽 올레길 코스는 4,5,6번을 모두 걸었지만 왠지 모르게 조용하고 잔잔한 느낌이 많이 드는 풍경이어서 활발한 느낌보다는 노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날씨가 좋으니 새빨간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시작 지점부터 마음만은 한껏 신이 났지만 컨디션이 정말 너무 좋지 않았다. 생리학적으로 힘든 날이 다가오기는 했지만 시작 지점부터 골반이 너무 아파서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다리까지 절뚝거리고 있었는데 너무 아프면 그만 가도 된다는 그의 말에 ‘옆에서 도와주면 할 수 있어. 급할 거 없으니까 천천히 가자’라고 답했다. 최근에 길이가 긴 올레길을 많이 걸었는데 그런 코스들을 걸을 때마다 자꾸만 걷는 시점이 늦어졌고 그래서 주변을 보기보다는 얼른 도착점에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었던 거 같았다. 그래서 긴 코스를 걸을 때마다 늦게 출발했지만 완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곤 했었는데 아픈 덕분인 건지 차분히 이 길들을 거니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쨍한 햇살에 비추니 도민들이 이때다 싶어 실 마디마디에 오징어를 묶어서 돌담 옆에 걸어두기 바빴다. 힘차게 돌아가는 바람개비 옆에 펄럭이는 오징어의 그림자를 영상으로 담고 있자니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멍하니 보고 있게 됐다. 중간중간 쉬어가며 바다의 소리만 크게 존재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내륙 쪽으로 들어서고는 별로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앞으로 들쳐 메고 임산부처럼 뒤뚱뒤뚱 걸었다. (원래 많이 지치거나 많이 무거울 때 가방을 앞으로 메는 버릇이 있다.) 느린 걸음에 절뚝대는 다리에 한 발 한 발 겨우 딛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그는 계속 괜찮겠냐는 질문을 하며 힘들면 그만 걸어도 된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나를 잘 아는 그는 일부로 그런 말을 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_바닷길 옆 돌담에 앉아 한라봉도 까먹고 집에서 싸온 과자도 먹었지만 계속되는 체력 소비에 배가 고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도착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서 식당을 찾기 시작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지나가다 보이는 아무 곳에나 들어섰다. 생각보다 컸던 식당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 두 분이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는데 누가 봐도 부부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김밥천국 정도의 맛이면 감사하겠다는 마음으로 제일 무난한 메뉴 두 개를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둘이서 토끼눈이 되어 음식을 흡입했다. 식당에서 신발을 벗고 있는 게 예의는 아니지만 잠깐이라도 발에게 숨 쉴 기회를 주고 싶어서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발을 주무르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이쁜 아가씨를 힘들게 하면 어떻게 해’라며 그를 장난식으로 나무라시기도 했다. 올레길은 내가 걷자고 조른 건데 말이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올레길에 대한 여담을 좀 더 나누고 도착지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걷기 위해 가게를 나섰다.


크게 높은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없는 평범한 길에 도착지까지 키로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체감으로는 식당까지 걸어온 것보다 두배는 더 되는 거리를 걷는 기분이랄까. 이런 게 체력이 좋고 나쁨의 차이라는 생각이 깊게 들었다. 조금씩 하늘이 물이 들었고 그 언저리쯤 우리는 6코스의 출발지점인 쇠소깍 다리에 도착했다. 이쁜 하늘을 보며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는 집 근처에 가면 내비를 안 봐도 괜찮을 정도로 제주의 지리를 다 외워버렸는데 다 정이 들어버린 이 동네를 떠나려니 마음이 적잖이 일렁였다. 나중에 집에 와서 알고 보니 족저근막염이 있는 그도 발이 처음부터 부서질 듯 아팠더란다. 왜 말을 안 하는지.


옆에 있다는 것 만으로 서로에게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관계가 이 세상에 얼마나 존재할까. 발걸음을 맞춰서 걷고 있는 우리가, 손을 꼭 붙잡고 아픔을 견디고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고 결국엔 끝까지 걸어온 우리가. 딱 오늘 이 하늘만큼 이쁘게 느껴졌다. 그와 함께라면 내가 왠지 슈퍼우먼이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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