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난폭하면 생기는 일에 대해.
7년 전, 3월 판교의 유명한 IT회사.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600대 1이라는 기록적인 경쟁률을 뚫고 인사팀에 입사하게 되었다.
전 직장에서 인턴으로 연봉 1080만 원을 겨우 벌던 딸이
유명한 IT회사 그것도 인사팀에 취업했다니! 부모님은 참 기뻐하셨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팀을 회사 내 고급직무로 생각했다)
입사 후 2주 뒤.
나는 매일 10시까지 야근을 했다. 신입사원이 무슨 일이 많기에 야근을 하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내가 자료를 만들려고만 하면, 항상 내 뒤에 서서 ‘어디 너 잘하는지 보자’ 던 부장님이 계셨기에,
빨리 퇴근할 수 없었다.
그가 내 자리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놓라면, 그동안 잘 해냈던 것도 안되고
뒤통수가 섬뜩한 정도로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일 잘하는 사원이 되어 그의 감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불안 섞인 야근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날도 나는 사수가 알려주는 업무를 하나라도 더 기억하고자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옆에 있던 부장님은 나의 입사를 축하하기 위해 저녁에 회식을 하자고 제안하셨고,
그렇게 첫 번째 팀회식이 이루어졌다.
밥을 먹기도 전에 내게 술을 권하던 부장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인사팀은 다른 팀이나 타사 사람들과 술 마시면서 친해지는 경우가 많아. 때론 접대도 필요하지.
수혜 네가 실수하면 안 되니깐 오늘 너의 주량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거야. 우리 팀 신입은 다 한 번씩 경험했어'
이게 무슨 말인가? 인사팀의 역할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겠다.
근데 그게 내 주량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정말 안주 먹을 시간이 없다는 여느 술자리 노래처럼 내 술잔에는 술이 연신 부어졌다.
반 병 이상을 쉬지 않고 마신 후, 더 마시면 실수할 것 같아 못 먹겠다고 우는 시늉을 하며 부장님에게 말했다.
그러자 부장의 반응이 더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 취해서 네 머리카락이 김치찌개에 들어가는 걸 봐야겠어, 네가 안 마시면 네 옆에 앉아있는 과장이랑 대리 먹이지 뭐’
내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다던 그는 꽤 재미있어 보였다.
결국 회식 시작한 지 1시간도 안돼서 부장을 제외한 모든 팀원이 취했고,
나는 취한 와중에도 억울함에 오기가 생겨 화장실에서 술을 게워내고 다시 마시고, 또 화장실 가서 술을 게워내고 술을 마셨다. 대학생 때도 이렇게는 안 마셨다. 이걸.. 토마토(토하고 또 마시고의 줄임말)라고 했던가?
지금 생각하면 '그냥 취한 모습을 보여줄걸 그랬나'라는 마음도 들지만, 그때는 작정하고 날 취하게 만들고 싶어 낄낄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면, 분함과 오기가 들었다.
이를 악물고 중심을 지키며 걸었고, 발음을 똑바로 했다. 그렇게 겨우 첫 번째 술자리가 끝났다.
다음날 아침.
숙취로 눈물이 날 만큼 속이 아팠지만, 부장 앞에서 만큼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멀쩡한 척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젊은 게 좋네? 너 술 세다! 좀 더 먹여야 했는데..’
2주 뒤. 타회사 사람들과의 회식 후, 그다음 주에 또 팀회식을 했다.
(다른 회사 인사팀도 이렇게나 회식이 많은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날의 부장은 정말 작정한 사람 같았다.
못 먹겠다던 내 말에 나 대신 내 옆에 앉아 있던 대리와 과장에게 술을 또 먹였고,
‘너 때문에 얘네들이 취하는 거야’라는 말을 하며 내 죄책감을 건드렸다.
그때는 마치 구석에 몰린 것 같은 심정이었다.
누구도 난폭한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고,
팀원들의 정신은 바람에 흩날려나가는 민들레 씨앗같이 공중으로 분해되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오기를 부려 끝까지 받아 마시다가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고 내 방 침대였다.
알고 보니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도망을 온 것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나는 내 가방과 외투 모두 회식자리에 버리고 탈출을 해냈다.
부장님과 다른 팀원들은 내가 납치라도 된 줄 알고 판교 상가 전체를 뒤졌다고 한다.
취해서 온 나는 엄마와 언니를 보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취하면 왜 이렇게 서글픈 감정이 쏟아지는지.
내 바지 주머니 속 수십 통 전화 오는 휴대폰을 발견한 언니는
부장님과 통화하던 도중, 울었다고 한다.
우리 수혜가 이렇게 취해서 집에 오는 애가 아닌데 너무 취했고 정신을 못 차린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집에 들어가시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얼굴만 보면 싸우기 바빴던 언니가
나를 안쓰러워하며 울었다니 7년 전 일인데도 여전히 그 말이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장은 철장에 갇힌 햄스터쯤으로 날 대했던 게 아닐까 생각 든다.
'끊임없이 괴롭혀도 살아남을까?'라는 악의적인 취미로 재미 삼아 날 지독하게 못살게 군걸 아닐까 하고.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인생 최악의 상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걸 알면서도 나는 쓰라린 속을 부여잡으며 다음 날 출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