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출근 후 아침.
술에 취해 회식자리에서 몰래 탈출한 나 때문에 고생했을 팀원들에게 죄송하다는 의미로 커피를 하나씩 돌렸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부장의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두는데,
그 순간 멀리서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그가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화내는 그의 모습에 한껏 긴장이 되었다.
‘어제 내가 회식 중간에 도망가서 저렇게 화가 난건가?
나 어떡하면 좋아..‘
그러나 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고, 옆에 있는 차장에게 화난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오늘 차 끌고 출근하는데, 어떤 놈이 뒤에서 빵빵거리는 거야!
그래서 그 차 앞으로 껴들어 차 세우고 엄청 싸웠잖아, 뭣도 아닌 게 감히 어디서 빵빵거려?’
험한 욕도 중간에 섞여있었는데,
듣고 있는 내가 다 살벌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항상 분노조절이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덕분에 나의 ‘회식도망사건’은 묻히게 되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부장은 대리에게 영수증을 주며 접대비용으로 사용했으니 법인계좌로 처리하라고 하였다.
그는 주변 남자 팀원들에게 유흥업소 다녀온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입에 담기에 민망한 이야기를 과감 없이 해댔다.
사실 많은 회사에서 유흥업소 접대를 한다지만,
부장 입에서 나오는 저급한 단어들과 적나라한 표현에 나는 너무 경악스러웠다.
‘아니.. 카카오톡 프로필이 딸 사진 아닌가..?
자기보다 20살 어린애들이랑.. 재밌나..?
그보다 저렇게 떳떳하게 자랑할만한 소재인가..?’
최근 다른 팀원들에게 신입이라며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얘 얼굴 반반하지? 앞으로 많이 이뻐해 줘~’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며
괜히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순간적으로 불쾌해졌다.
내 주변 지인들은 출근이 힘들다고 했지만, 나는 출근하기가 무서웠다.
주말에는 엑셀과외를 했고,
덜 혼나기 위해 매일 야근을 했다.
내 회사생활의 최대 목표는 일을 잘하게 되어 부장의 악의적인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하루라도 휴가를 내려고 하면,
그 전날에는 반드시 새벽까지 근무를 해야 부장의 미움을 피할 수 있었고 내 생각, 내 시간, 내 감정 등은 그 회사에 존재가치가 없었다.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님들이라면 많이 답답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다.
‘회사가 거기 하나인 것도 아닌데 그냥 퇴사하면 되는데 왜 그걸 안 해?!’
독자님들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하지만 내게도 이유가 있는데,
회사에서 하루하루 이슈가 많아서 오래 다닌 것처럼 보이시겠지만,
사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겨우 2개월 재직의 일이었다.
2개월 동안 수많은 모욕과 술강요를 당했지만,
나는 신입이었고 업무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혼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나 스스로를 혼나도 괜찮은 인간이자 모욕당해도 참아야만 하는 위치로 생각했다.
또한 요즘에는 이직이 ‘능력 있음, 자기 선택, 새로운 도전’이라는 긍정적인 키워드이지만, 7년 전에는 ‘무능력함, 변덕, 포기’라는 느낌이 내게 강했다.
지금은 회사 상하관계에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의식이 당연스러워졌지만,
7년 전 내 주변에는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 너만 유난이야’라는 조언의 탈을 쓴 폭력적인 말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내가 그 당시에는 사회경험이 적었고,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기준이 없어,
오히려 나 스스로를 더 혹독하게 대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게는 희망이 하나 있었는데
일을 잘하게 되면 더 이상 부장이 날 안 괴롭힐 거라는 생각이었다.
즉, 부장이 날 괴롭히는 이유는 내가 멍청해서 일거라는 전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부장보다 더 악마 같은 인간은 사실,
자존감 낮고 자기 확신이 부족했던 나 스스로였다는 걸
나는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이러한 변명 섞인 끔찍한 자기 체벌의 이유로 나는 계속 이 회사에 다녔지만,
재직 3개월 될 때쯤 결국 퇴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일이 터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