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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레트로 무드

-<중경삼림>과 홈커밍데이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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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추억의 영화 한 편을 보게 됐습니다. 바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에요.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 개봉한 이 영화를 28년 만에 다시 보게 되다니... 게다가 영화 전편을 수놓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은 지금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중경삼림.jpg <중경삼림> 리마스터링 개봉 포스터(네이버 영화 포토 이미지에서 가져왔습니다.)


1995년 개봉했던 <중경삼림>을 처음 본 곳은 종로 2가에 있던 코아아트홀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영화에 푹 빠져 있던 시절이라 코아아트홀은 어설픈 영화 키드의 성전 같은 곳이었죠. 여기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이창동의 <박하사탕>, 첸카이거의 <패왕별희> 같은 영화를 보며 울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중에서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꽤나 기억에 남는 영화였어요. 금발 가발에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홍콩의 뒷골목을 종횡무진 활보하는 마약밀매업자 임청하와 뽀얗고 앳된 얼굴로 미친 듯 조깅을 하며 이별 후유증을 달래는 경찰 223 금성무의 첫 번째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지만, 더 재밌었던 건 보이시한 스타일의 귀여운 왕페이와 진중한 듯 유머러스한 경찰 633 양조위의 조합이었죠. 이 두 번째 에피소드를 보며 엄청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28년 만에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본 영화는 느낌이 조금 달랐습니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한 왕가위 감독의 현란한 스타일은 지금 봐도 굉장히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해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듯했고, '통조림'으로 대변되는 '사랑의 유통기한'에 대한 이야기는 '사랑'보다는 '시간'에 방점이 찍혀 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경찰 223으로 등장하는 금성무의 명대사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나, 경찰 633 양조위가 말하는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대사는, 이 서로 다른 분위기의 두 가지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해 준다는 느낌을 갖게 했고요.


더 신기한 건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대학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는 겁니다. 영화를 보러 신촌에서 종로 2가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던 기억, 함께 영화를 봤던 친구와 선후배들, 한때 소중하게 모아두었던 영화표와 영화 리플릿, 포스터 등등. <중경삼림>이라는 영화 한 편이 가져다준 기억의 쓰나미에 휩쓸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달까요. 이런 와중에 학교에서 30주년 홈커밍데이를 한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나 혼자 레트로 무드'에 빠져 지낼 듯합니다.


그나저나 친구가 간다길래 아무 생각 없이 홈커밍데이 참가 신청을 했는데, 괜히 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원래 동창회란 '인맥 쌓기의 장'인 법인데, 사교성도 사회성도 찾아보기 힘든 저 같은 사람이 갈 만한 곳은 아니지 싶어서요. 본 행사가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던데, 잘 견딜 수 있을까요? 심히 걱정되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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