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달짝지근해: 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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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엔 '유해진과 김희선의 로맨스? 이게 가능해?'라고 생각했습니다. 로코의 장르적 특성상 남주와 여주의 로맨스를 납득시키기 위해선 차곡차곡 쌓아가는 서사가 필요한데, 미녀와 야수도 아니고 남주가 유해진, 여주가 김희선이면 아무리 서사가 쌓여도 몰입이 불가능하지 않나 싶어서요. 그런데 웬걸, 이 영화 그 어려운 걸 해냅니다. 제목대로 아주 달짝지근하게요.
오랜만의 영화 관람에서 '달짝지근해: 7510'을 선택한 이유는 아주 심플했습니다. 원래 심각한 영화를 꺼리는 취향인 데다 혼자 보는 영화였기 때문이죠. 남편이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나가버린 주말, 집에 혼자 있으려니 너무나 무료하고 심심해 영화 관람에 나선 참이었으니, 재미난 로코로 기분 전환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영화평이 좋았던 것도 한몫했고요.
선택은 옳았습니다. 119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시간에 강박관념이 있는 과자 회사 연구원 치호와 대학생 딸을 둔 비혼모이자 캐피털 회사 상담원인 일영의 캐릭터도 매력적이었어요. 작명 센스 역시 아주 유쾌했습니다. 제목 옆에 붙은 저 숫자는 뭘까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남주와 여주의 이름을 조합한 거더라고요. 75는 치호, 10은 일영. 제목처럼 달짝지근한 두 사람의 로맨스가 아주 촘촘한 서사를 거쳐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것 또한 만족스러웠습니다.
특히 이 영화가 좋았던 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첫 번째 이유는, 의도된 미스 캐스팅이에요. 치호 역의 유해진과 일영 역의 김희선, 이 두 사람의 조합은 암만 봐도 언밸런스합니다. 오히려 치호의 형인 석호 역의 차인표와 김희선이 연인이었다면 쉽게 납득이 됐을지도요. 하지만 관객의 허를 찌르는 듯한 이 역발상의 캐스팅은 '달짝지근해: 7510'의 탁월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주인공인 일영은 어린 나이에 딸을 출산한 비혼모로 등장하는데, 그 상대인 아이 아빠 이육구는 외모는 뛰어나지만 성격은 개차반인 땅꾼이거든요. 임신 소식을 알리자마자 낙태를 강요하는 책임감이라곤 '1'도 없는 파렴치한에 올림픽 주기로 나타나 일영과 그 딸을 괴롭히는 쓰레기이기도 하고요. 오죽하면 딸이 아빠를 쏴 죽이고 싶다며 사격선수가 됐겠어요? 그러니 외모는 좀 빠지더라도 순박하고 착실한 데다 형의 대출까지 감당할 만큼 책임감이 남다른 치호가 일영의 눈에 들 수 있었던 거죠. 게다가 이육구 역으로 특별 출연한 카메오 배우의 정체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웃음 포인트이기도 합니다. 스포라 밝히진 않겠습니다만,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캐스팅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예요. 특히 유해진 배우의 섬세한 표정 연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치호와 일영의 로맨스를 100% 공감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뭐랄까, 연기를 너무 잘하니 못생긴 얼굴도 잘생겨 보이는 기적이 연출됐달까요. 생기발랄 긍정 캐릭터인 데다 솔직하게 할 말 다 하는 일영을 너무나 사랑스럽게 소화한 김희선 배우의 코미디 연기도 '엄지 척'을 하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언밸런스해 보였던 역발상 캐스팅이 이 두 배우 덕분에 최고의 캐스팅으로 바뀐 거죠. 게다가 철없고 염치도 없는 형 석호역을 맡은 차인표 배우, 자아도취에 빠진 과자 회사 사장 병훈 역의 진선규 배우, 예측불가한 과몰입 캐릭터 은숙 역의 한선화 배우도 제 몫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이들 재미있고 유쾌한 캐릭터 덕분에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을 정도니까요.
세 번째 이유는 조금의 빈 틈도 없이 잘 짜인 시나리오(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각본에 참여했습니다!)와 담백해서 더 효과적인 연출('완득이', '증인' 등을 연출한 이한 감독 작품입니다!)이에요. 이를테면 영화의 주요 공간 중 하나인 '김밥천국'은 치호와 일영이 가까워지는 유머의 소재로, 두 사람의 추억의 장소로, 또 엔딩 공간의 모티브로 쓰입니다. '김밥'이 두 주인공의 촘촘한 서사의 일부로 작용하는 거죠. 또 임시완, 고아성, 염혜란처럼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들이 사소한 듯 의미 있는 캐릭터로 등장해 치호와 일영의 로맨스를 더 탄탄하게 만들어줍니다. 카메오까지도 아주 치밀한 전략 하에 캐스팅한 셈이죠. 클로즈업과 슬로모션, 화면 분할을 적절하게 사용한 연출도 훌륭했어요. 덕분에 한 편의 '웰메이드 로코'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주변에 있을 법한 평범한 이들의 로맨스를 따뜻한 시선과 유쾌한 감성으로 풀어낸 이 영화. 약간의 판타지스러운 면(일례로 엔딩 부분에 등장하는 석호의 개과천선)이 '저게 가능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럼에도 2시간의 시간 투자가 전혀 아깝지 않은, 후회 없는 선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