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서시'와 자식 키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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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기압의 변화 또는 사람이나 기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을 뜻하는 바람도 좋고,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뜻하는 바람도 좋습니다. 바람을 생각하면 늘 시원하고 청량한 여름이, 그리고 어린 시절 줄노트에 적어두었던 작은 꿈들이 떠오릅니다. 바람,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요?
사실, 이 글을 쓰기 전 '바람'이란 단어를 떠올렸던 건, '바라다'라는 동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 생각은 이랬어요. ''바라다'의 명사형은 '바람'이지? 아, 그런데 바람은 또 자연의 '바람'이 있네. 자연의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 바라다의 바람은 간절한 마음의 움직임. 이거 재밌네.' 뭐, 이런 식이었죠. 저는 이런 동음이의어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동안 자연의 '바람'과 바라다의 '바람'이 동음이의어라는 건 전혀 떠올리질 못했어요. 머릿속에서 이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생각한 적이 없어서 그랬나 봐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제가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 '서시'에서도 '바람'은 중요한 역할을 하네요. '별'만큼이나요.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의 불안과 고통을 상징한다는 '바람'은 공기의 움직임을 뜻하는 자연의 바람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의 움직임 같기도 해요. 시는 은유와 상징의 조합과도 같으니까요. 아무려나, 서시의 '바람'은 아득한 밤, 아무도 없는 길 한복판에 불어닥친 거센 회오리 같기도 하고, 잔잔한 공기의 일렁임 같기도 한 아련한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적어도 제 머릿속에서는요.
앞의 얘기와는 전혀 다른 얘기라 좀 뜬금없긴 하지만, 요즘 저의 '바람'은 아들의 대학 입학입니다. 고3 수험생인 아들은 얼마 전 대학에 가고 싶지 않다는 말로 저를 기함하게 했어요. 꼰대라 불러도 할 말은 없지만, 전 대학은 꼭 가야 한다 주의거든요. 그래서 공부엔 뜻이 없는 아이를 꼬시고 꼬셔서 간신히 실용음악과에 지원하는 걸로 합의를 봤는데, 이제 와서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니 엄마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네요.
하지만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얘기하는 아들에게 차마 '그렇게는 안 된다'는 얘긴 하지 못했어요. 어차피 공부가 아닌 실기로 대학에 가야 하는 상황이라, 본인이 하기 싫다고 하면 억지로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요. 게다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본인은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생각하니 무조건 반대를 할 순 없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이렇게만 말해 주었습니다. 네가 대학에 가기 싫다면 엄마가 너에게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대학에 가는 것 역시 너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기회다, 라고요.
그러곤 퇴근한 남편에게 아들과 나눈 얘길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럼 실용음악과 말고, 다른 데라도 보내자, 2년제 대학교 중에서 갈 수 있는 데가 있지 않을까?'라고 하네요. 아직 정시 지원까진 시간이 남아 있긴 하지만, 아들이 남편의 얘길 받아들일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밝혀질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때까지 저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자식 키우는 일, 참 쉽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