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丙)’으로 사는 행복

-‘을(乙)’보단 역시 ‘병(丙)’이지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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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랜만에 일 얘기를 좀 해볼까 해요. 사회적 위계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사회적 갑을관계에서 저는 '병'에 해당합니다. 이 바닥(?)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클라이언트 잡'은, 대기업(중견기업)인 '갑'이 편집디자인 회사(출판사)인 '을'에게 일을 의뢰하면, '을'이 '병'인 저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거든요.


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와 '을'과 '병'의 관계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갑'과 '을'은 전반적으론 협력관계지만, 가끔은 각자의 입장과 이익에 따라 대립관계로 변모하기도 하거든요. 이를테면 '갑'의 요구를 전부 반영할 시 프로젝트의 완성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든지, 프로젝트를 완료한 후 '갑'이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처음 계약 금액보다 낮은 금액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든지 하는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을'과 '병'의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요. 하지만 가능성은 대체로 낮은 편입니다. '을'과 '병'은 서로를 존중할 뿐 아니라 우호적이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거든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을'과 '병'은 프로젝트 완성도 제고, 고품질의 포트폴리오 확보, 매출 확대라는 동일한 목표를 바라보며 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가장 힘든 쪽은 '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간 역할을 해야 하니까요. 이를테면 '갑'의 요구사항에 적절하게 반응하되 무리한 요구에 대해선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병'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지원과 관리를 해야 해요. 한 마디로 프로젝트 관여도가 가장 높으면서 해야 할 일도 가장 많은 게 바로 '을'인 셈이죠.




저도 한때는 '을'이었던 적이 있어요. 편집 기획사 AE로, 잡지사 에디터로 클라이언트 잡을 했던 시절에요. 그때 저는 한 번만이라도 '을'을 탈출해 '갑'이 되어보는 게 소원이었답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한 번도 오지 않았어요.ㅠ.ㅠ 대신 프리랜서로 독립하면서 '을'에게서 일을 받는 '병'이 되었죠.


그런데, 이게 웬일이죠? '병'이 저한테 너무 잘 맞는 거예요. 내 할 일만 제대로 잘하면 싫은 소리 들을 일이 없고, '갑'도 '을'도 '작가님, 작가님' 하며 존중해주고, 간혹 '갑'이 무리한 요구를 해와도 '을'이 중간에서 잘 걸러주니, '을'이던 시절과 비교하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거의 없다고나 할까요? '병'이 된다는 건 '을'보다 더 힘들어진다는 얘기 아닐까, 라는 생각은 저의 착각이자 편견에 불과했던 거죠.




물론 일이란 건 여러 사람이 얽혀서 진행하는 거고, 일의 완성도를 높이는 건 모두가 합심해야 가능한 일이니, '갑을병'을 굳이 나누는 건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병'이 된 후 제 행복지수는 나날이 상승 추세라, 제 입장에선 '을'보단 역시 '병'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뭐, 다시 생각하면 사람의 행복은 '갑'이냐 '을'이냐 '병'이냐가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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