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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설, 시어머니의 설

-엄마의 명절 나기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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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시어머니는 한 살 차이다. 우리 엄마는 일흔여덟, 시어머니는 일흔일곱. 나이가 들수록 하루가 다르고 일 년이 다르다더니, 설이라 오랜만에 만난 엄마 얼굴에 주름이 더 늘었다. 다리가 아파서 허리가 구부정해진 엄마 모습에 '아, 우리 엄마가 많이 늙었구나' 싶어 새삼 맘이 아팠다. 시어머니도 몸이 안 좋긴 마찬가지다. 다리가 후들거려 오래 걷지 못하고 조금만 무리하면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사정이 낫다. 며느리가 있으니 설 차례상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시어머니 힘들까 봐 알아서 장 보고 알아서 전 부치고 또 알아서 이런저런 준비들을 뚝딱 해치우니 말이다. 문제는 내 엄마다. 엄마는 며느리가 없다. 아들이 뒤늦게 이혼을 하는 바람에 설 차례상 차리는 일이 온전히 엄마 차지가 됐다.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 딸 하나니 도와줄 사람도 없다(아들은 생전 해본 적이 없어 음식 할 줄을 모르고 딸은 제 시댁 차례 준비하느라 엄마를 도울 수가 없다). 이젠 음식 하기도 귀찮을 나이이건만, 그래도 설이면 찾아올 손주들 먹일 생각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직접 식혜를 담그고 동그랑땡을 만들고 꽃게찌개를 끓이고 잡채를 무치신다.


아마 그 음식들 만들려고, 분명 추운 겨울에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엄마가 사는 곳은 시골이라 시장까지 거리가 꽤 멀다) 장을 보러 나가 식재료를 구매하고, 돌아와 앉을 새도 없이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음식 준비를 했겠지. 안 봐도 눈에 뻔히 보이는 풍경을 생각하니 속이 상해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엄마, 암만 생각해도 오빠가 불효자다. 이 나이에 엄마 혼자 차례상 차리게 만드니..."라고 불만을 토로해 버렸다. 그랬더니 "뭐, 예전에도 엄마가 다 해놓은 다음에 걔들이 왔지. 언제는 일찍 와서 도와줬나?" 하시는 거다. "그래도 며느리가 있으면 뭐라도 거들어주겠지. 엄마 혼자 다 하진 않을 거 아냐?" 했더니, "하긴, 요샌 좀 힘에 부치긴 해. 이젠 꿈쩍하기도 싫은데 차례상 차리려고 이것저것 준비하니까 다리가 너무 쑤시고 아프더라. 이젠 명절 돌아오는 게 무서워." 이런 말이 되돌아왔다.




이제 2년 후면 엄마 나이도 80인데, 언제까지 엄마가 설 준비를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아직까지 음식 장만할 수 있는 기운이 남아 있는 걸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그 연세가 되도록 엄마 혼자 음식 장만을 해야 하는 상황을 슬퍼해야 할까.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음식 준비하느라 며칠을 고생했을 엄마의 설과 며느리 덕에 음식 장만에 신경을 덜 썼을 시어머니의 설을 비교하니 순간 마음이 울컥해 눈물이 찔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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