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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밥과 남편

-정월대보름의 의미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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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정월대보름. 새해 들어 처음 맞는 보름이자, 만월(滿月)이 뜨는 날. 한때는 설만큼 중요한 명절이었다는데, 이제는 그냥 평범한 날들 중 하루가 된 듯해 어쩐지 서글퍼진다.


어제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혜정아, 내일 오곡밥이랑 나물들 가지러 언제 올래?" 물으시길래, "엄마, 몸도 안 좋은데, 굳이 하려고요? 귀찮지 않아? 괜찮겠어?"하고 되물었다. 여러 가지 잡곡으로 오곡밥을 짓고, 말려둔 건나물들을 물에 불렸다가 하나하나 볶아내는 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일인 줄 알아서다. 그랬더니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귀찮다고 안 하니? 일 년에 하루뿐인데... 쉬엄쉬엄 하면 돼." 하긴, 내가 하지 말란다고 안 하실 어머니도 아니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오후에 가지러 갈게." 전화를 끊은 다음에 든 생각은 이랬다. '그나마 어머니가 살아계시니 오곡밥에 나물들도 챙겨 먹을 수 있는 거지, 안 계시면 누가 그 귀찮음을 감수하고 내게 이런 절식(節食)을 챙겨 줄까? 감사하면서 맛있게 먹어야겠다' 다짐했다.




오늘 오후, 어머니 집에 오곡밥이랑 나물들 가지러 다녀온다고 하니 남편이 잘 갔다 오란다. 아무래도 같이 갈 생각은 없는 눈치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두고 혼자 어머니 집에 갔다. "엄마, 나 왔어요" 했더니 시어머니가 반기시며 잔뜩 해놓은 나물들을 맛보라고 젓가락을 주신다. 건가지나물, 건취나물, 건고사리나물, 건곤드레나물, 시래기나물. 총 다섯 가지 나물이 푸짐하게 담겨 있다. 하나씩 집어 먹어 보니 맛도 좋고 식감도 좋아 입맛이 돌았다. 그래서 아예 오곡밥까지 달라해서 어머니 집에서 밥 한 끼를 해결했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잘 먹으니 기쁘고 좋으신지 자꾸 뭘 더 먹겠느냐 물어보신다. "아냐, 엄마. 이제 배불러요" 했는데도 옆에서 자꾸만 "간이 너무 세진 않니? 밥이 너무 질지? 우리 아들은 진 밥은 싫어하는데, 어쩌나? 질지 않게 한다고 했는데도 물 양을 못 맞췄나 봐. 나도 음식 하는 게 옛날 같지 않다니까", 이런 말을 하며 걱정을 하시는 거다. 그래서 내가 "뭘 그렇게 걱정해요? 주는 대로 먹으라 그러면 되지" 했더니, 어머니는 "그래도 기왕 하는 건데, 맛있게 해 주면 좋잖아" 하시면서, 하나라도 더 싸주지 못해 안달을 하셨다. 그래서 얼른 "됐어요, 엄마. 이제 그만 줘. 다 먹지도 못해" 이렇게 손사래를 친 후, "엄마,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인사하고는 집으로 왔다.


집에 와 남편 먹으라고 밥을 차려주니 남편이 하는 말. "나는 오곡밥보다 흰밥이 좋은데... 흰밥은 없어?" 헐, 엄마가 열심히 해준 오곡밥 대신 흰밥을 먹겠다고? 이건 뭔 소리? 그래서 얼른 "오곡밥 말고는 밥 없는데... 햇반밖에 없어" 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그랬더니 군소리 없이 먹는다. 그러다 갑자기 "근데, 혜정아, 정월대보름에 이 나물들은 왜 먹는 거야?" "음, 옛날에는 지금처럼 사시사철 채소가 있는 게 아니니까, 한창 제철일 때 나물들을 말려뒀다가 채소가 안 나는 추운 겨울에 먹었던 거지. 김장도 그런 거잖아. 우리 선조들의 지혜랄까?" "그렇구나. 근데 역시 이 나물들은 내 입맛에 안 맞아. 별로야. 난 신선한 채소랑 나물이 좋아. 건나물 말고. 그런데 엄마는 왜 맨날 잘 먹지도 않는 이런 걸 할까?" 이런이런, 엄마는 아들 먹이겠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정성 들여 밥을 짓고 나물을 무쳤는데, 쉰이 넘은 철없는 아들은 입맛에 안 맞는다며 먹기 싫다며 이러고 있다, 에휴. 결국 참다못해 한 마디 해주었다. "여보, 나이 많은 엄마가 정월대보름이라고 아들 먹이려고 애써 해준 음식에 불평불만 좀 하지 말고 잠자코 먹어. 건강에 다 좋은 거야"


싫은 건 바로 싫다 말하는 남편이지만, 이번에는 바로 "알았어" 대답하며 수긍한다. 하지만 결국 밥도 나물도 남기고 말았다. 수긍은 했지만 싫은 걸 꾹 참고 넘기진 못하는 성미라 그런가 보다.


엄마의 정성은 철없는 아들에겐 아직 가 닿지 못한 듯하다. 아니, 어쩌면 정월대보름과 그날 먹는 절식이 남편에겐 딱히 의미 없게 느껴진 것일지도... 50대인 남편이 이럴 정도면, 나중엔 정월대보름의 풍습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우리 애들도 오곡밥과 나물은 쳐다도 안 보니... 결국, 오곡밥과 나물들은 내 차지가 됐다는 얘기. 근데 이 많은 걸 언제 다 먹는담?


*결국 오곡밥은 양이 너무 많아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놨다. 나중에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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