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있어 괴롭고 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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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은 늘 '마감하다'의 연속입니다. 마감해야 할 원고가 줄줄이 있으니까요. 시간은 촉박한데 일이 잘 안 풀려서 해야 할 일이 쌓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달까요? 마감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답니다. 이런 증상을 25년 넘게 견디다니 저도 저 자신이 놀라울 뿐이에요.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여수와 금오도에 여행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친구 중 하나가 "혜정아, '마감하다'가 순우리말이래. 넌 알고 있었어?"라고 묻더군요. 저는 깜짝 놀라 "아니, 지금 처음 알았어"라고 답했어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전 '마감하다'가 '한자어+하다'의 조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뒤늦게 사전을 찾아보니 '마감하다'는 '막다'를 의미하는 '막-'과 명사 파생 접미사 '-암'이 결합된 형태라고 하네요. 뜻은 '하던 일을 마물러서 끝내다'이고요. 25년 넘게 마감이 있는 일을 하며 살아왔는데 그 어원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가 친구 덕분에 알게 되다니... 이래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짐작만으로 이렇다 저렇다 판단해선 안 된다는 얘기가 있나 봐요.
이번 여행은 3월 5일부터 2박 3일간 대학 절친들과 함께한 여행으로, 만화가인 친구의 취재를 겸한 것이었어요. 새로 들어갈 작품의 배경이 될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저와 다른 한 친구에게 '같이 갈래?'하고 의견을 물었는데, 둘 다 신이 나서 '그래, 가자!'하고 의기투합하게 된 거죠. 다들 프리랜서라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막상 떠날 무렵이 되니 제 상황이 영 좋질 못했어요. 하필 진행하던 일들의 마감이 겹친 데다(일정이 지연되는 바람에...ㅠ.ㅠ) 새로운 일까지 들어와 머리가 복잡했거든요. 그래도 이미 모든 예약이 끝난 상태이고 의리상 안 갈 순 없는 노릇이라, 여행 가방에 노트북까지 주섬주섬 싸들고 여수를 향해 출발했답니다.
KTX를 타고 가는 내내 노트북으로 원고 작업을 하고, 여수 숙소에 도착해서도 밤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원고를 쓰고 다음날 아침에 클라이언트와 화상회의까지 하고 나니, '멘붕' 상태가 되더군요. 출판사 기획·편집 프리랜서인 다른 친구도 상황은 비슷했는데, 제가 "친구야, 여기까지 와서도 이러고 원고를 쓰고 있으니 '현타'가 제대로 오는구나. 이게 뭔 짓인지... 뭐, 얼마나 좋은 꼴을 보겠다고..." 이렇게 신세 한탄을 했더니만,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해주더군요. "아니지, 혜정아, 이렇게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여행도 다닐 수 있는 거야. 이거 저거 다 따지고 생각하면 여행 못 와. 얼마나 좋으니? 어차피 집에서도 노트북 끌어안고 원고 작업이나 하고 있을 텐데, 여기 와서 낮에는 신나게 돌아다니고 맛난 것도 먹고, 밤이랑 이른 아침에만 작업하니 집중도 잘 되잖아."
저는 친구의 말을 듣고 '오호라, 같은 일도 관점을 달리 하면 이렇게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하구나' 생각하며 감탄했습니다. 게다가 만화가인 친구도 우리 둘 다 엄청 바쁜 시기에 자신의 취재 여행에 동행해 줬다고 고마워하더라고요. 사실 모든 계획은 그 친구가 주도해서 짜주고, 예약도 다 해주고, 우리는 따라다니기만 한 거라,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도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은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구나'를 실감하는 계기이기도 했답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하고, 또 그 친구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깨닫고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도 고마웠고요.
'마감하다'는 여전히 괴롭고 힘든 과정의 연속이지만, 그 과정 속에 이런 소소한 깨달음과 재미, 행복이 있어서 또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