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하다

-일상과 비일상 그 사이

by 최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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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에 가면 '일상비일상의틈'이라는 곳이 있다고 해요. MZ세대가 좋아하는 '핫플'이라는데, 사실 여길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다만 저 공간의 이름을 듣고 '참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과 비일상의 사이, 그 틈에 있는 공간. 우리 모두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아주 가끔씩 비일상적인 상황과 공간을 갈망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저 공간의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참 절묘하다 싶고, 그 낯 모를 사람을 Respect 하게 되네요.


요즘 저는 모순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냐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평범한 일상을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또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죠. 그런데 내 안온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나의 일상을 파괴하고 있는 거예요. 두 개 프로젝트의 마감이 번갈아 닥치면서 하루에 4~5시간밖에 못 자고 하루 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생활을 벌써 2주 넘게 하고 있거든요. 2주 동안 10번의 요가 수업 중 겨우 1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을 정도예요.ㅠ.ㅠ 이렇게 일상을 위한 일이 일상을 파괴하는 모순. 과거에도 이미 여러 번 겪었던 일이고 또 다른 분들도 많이 겪고 계신 일일 텐데, 이번엔 유독 견디기 힘든 이유는 뭘까요?




다행인 건 지난 금요일, 힘든 일상 속 숨통이 트이는 비일상의 틈을 찾았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별러왔던 '알버트 왓슨' 사진전을 친구들과 함께 감상했거든요.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전시라 못 보면 어쩌나 마음을 졸였었는데, 무리하게나마 일을 마무리 지은 덕분에 금요일 오후에 시간을 낼 수 있었어요.


전시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아주 정직한 포트레이트 사진으로 피사체의 특징을 순식간에 잡아내는 알버트 왓슨의 장기가 100% 발휘된 사진들이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거든요. 알프레드 히치콕, 앤디 워홀, 스티브 잡스 등 유명인사들의 사진은 물론 다양한 주제의 사진들이 즐비했던 데다, 디지털카메라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 사진 특유의 깊이 있는 질감과 색다른 프린팅 기법이 아주 근사했어요. 아주 오래전 처음 잡지 일을 했을 당시 자주 봤던, 슬라이드 필름으로 촬영한 밀착본 사진을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것도 큰 기쁨 중 하나였고요.


덕분에 추억은 일상과 비일상의 틈을 아름답게 메워주는 '아주 오래된 현재'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KakaoTalk_20230326_144200756.jpg 알버트 왓슨의 전시회 입구에 세워진 그의 대표작 사진들이에요. 이 사진들을 실제로 볼 수 있어 너무 좋았답니다.




전시를 관람한 후에는 '봉산옥'이라는 예술의전당 인근 맛집에서 만두전골과 오징어순대를 먹고, 2차로 '오늘, 와인 한잔'에서 화이트 와인과 치즈 플래터를 먹었어요. 정말 알차게, 평소와 다른 비일상을 즐긴 셈이죠.




저는 '일상'하면 '루틴'이란 단어가 먼저 떠올라요. 사실 제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평범한 일상'은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었어요. '평범하다'는 단어도, '일상'이란 말도,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니까요. 때문에 '판에 박힌 일상'이라는 의미의 '루틴하다'는, 긍정적이라기보다 부정적인 느낌이 강한 단어였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 '루틴'이란 단어의 의미는 180도 달라진 듯합니다. '일상의 루틴을 찾아라', '나만의 루틴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자주 쓰이니까요. 여기서 루틴은 '나의 일상을 지탱해 주는 나만의 법칙'을 의미하고요.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뉘앙스로 쓰이는, 이 기막힌 모순. 그런 의미에서 '루틴하다'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그 틈에 놓인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제발, 하루라도 빨리 이놈의 마감이 끝나서 아주아주 루틴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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