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을 싫어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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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우리의 외모는 꽤나 비슷했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고 대화마저 부족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선을 넘어선 안 된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나의 욕심과 강요로 인한 우리의 다툼은 꽤나 오래갔다. 딸은 입을 닫았고, 나는 딸의 눈치만 살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건 바로 다음 주에 있었던 상담에서였다. 딸은 상담 후엔 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음속 분노와 울화를 토로하면서 내내 우는 모양이었다. 그날도 딸은 울어서 눈가에 핏줄이 곤두서고 얼굴이 잔뜩 부은 채로 상담실을 나왔다. 나는 딸에게 “잠깐만 기다려. 엄마도 선생님 뵙고 올게”라는 말을 전한 후 상담실 안으로 들어섰다.
상담 선생님은 내게 “지난주에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요?”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나는 딸과의 갈등과 내 입장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한참 들은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 OO이가 지난번 서울예대 실기시험 보러 갔다가 충격받아서 한참 동안 힘들어했다는 건 알고 계세요?”
“아니요,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요.”
“OO이는 경쟁을 싫어할 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못 견뎌하는 아이예요. 아마 지난번에 전혀 준비를 못한 채로 갔다가 짧은 시간 내에 뭔가를 완성도 있게 써내야 한다는 것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이 되니 당연히 시험 보러 가는 게 꺼려질 수밖에 없죠.”
“전혀 몰랐네요.”
“이런 얘기도 하더라고요. 그날 자기는 너무 힘들고 위로가 필요했는데, 아무도 자기를 신경 써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뒀다고요. 엄마는 옆에서 감싸주고 위로해 줄 아빠가 있지만 자기는 아무도 없다고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 부러웠다고요.”
아, 그날 나는 울고 소리치며 딸을 비난하는 대신 딸의 아프고 속상한 마음을 달래주고 감싸줘야 했던 거구나. 딸이 내 말을 안 들어서 화나고 보기 싫다고 피하는 대신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다정하게 토닥거려 줘야 했던 거구나. 우리의 어긋난 관계는 내가 딸의 마음을 먼저 살피지 못하고 내 마음만 중시했던 결과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머니, 많이 애쓰시는 거 알고 있어요. 어머니처럼 좋은 어머니도 정말 드물고요. 하지만 OO이는 아직 성장기잖아요. 마음도 생각도 자라는 중이고요. 어머니는 그 시기를 이미 지나오셨으니까, 또 그 시기를 경험해 보셨으니까 좀 더 OO이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면 어떨까요?”
그날 상담 이후 나는 향후 예정돼 있던 두 개 대학 실기시험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수시 지원의 기회가 통째로 날아가버린 꼴이었지만 겸허히 받아들였다. 내 입시도 아닌데 꼴사납게 내가 전면에 나선 결과, 문제가 발생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이건 딸의 실패가 아니라 나의 실패였고, 나는 실패에서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딸도 다시 마음을 잡고 수능 준비에 전념했다.
뒤늦게 깨닫게 된 거지만, 당시 딸과 나의 갈등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중첩돼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은 딸과 나의 성향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었지만, 환경의 영향, 세대 간의 문제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국민학교를 겨우 나온 가난한 부모 밑에서 자란 막내딸이라 결핍에 익숙했다. 가난에 치이고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에 치이느라 어떤 것도 쉽게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어려운 경제 여건 때문에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을 먼저 생각했고, 하기 싫어도 참거나 혹은 하고 싶어도 포기하는 일을 당연히 여겼다.
하지만 딸은 상황이 달랐다. 나름 명문대 출신의 안정된 직장을 가진 부모의 맏딸로 태어나 전폭적인 사랑과 지원을 받았고,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선택하는 걸 당연시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갖고 싶은 걸 못 갖거나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고,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데 익숙했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후진국’, 우리 세대는 ‘개발도상국’, 우리 자식 세대는 ‘선진국’ 출신이라고. 같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시대 배경과 경제 환경, 사고방식 하에서 살아온 딸과 내가 극심한 갈등을 겪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