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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나는 반딧불' 노래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by 담연 이주원

얼마전 카페에서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었다.

처음 듣자마자 내 어린시절과 오버랩 되면서 마음을 울렸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잔잔하면서도 울림을 주는 곡조와 가사 이 곡을 듣는 사람은 대부분 마음에 울림을 받을거라 생각했다. 점심식사를 하고 조금은 여유 있는 시간 SNS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노래를 공유했다. 그런데 반응이 제각각이다.


아내는 “정중식 파트는 잔잔해서 좋고, 황가람은 고음이 예술이야”

가사는 뒷전, 역시 음악을 귀로 듣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고등학교 동창 단톡방에 노래 링크를 공유했더니 한 친구가 바로 전화가 왔다.

“버러지 같은 내 인생도 빛나길 바라며 한 곡 듣고 일해라.” 이 문구에 걱정이 되었나보다.

“야, 무슨 일 있냐?”

“아무 일 없는데. 그냥 노래가 좋아서.”

“그런 말 왜 써. 벌레 같다는 게 듣기 싫다. 벌레를 사람에 비유해서 난 그 노래 싫어.”

이러고 전화를 끊는다.

사람은 같은 노래를 들어도 자기 감정으로 듣고 자기가 보는 틀로 해석한다.

이건 심리학에서 ‘투사(projection)’ 라고 부른다.

노래든 그림이든, 결국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날 저녁에 첫째 다온이에게도 노래를 들려주며 물었다.

“이 노래 어때.” 그랬더니

“이 노래 나 알아. 나도 좋아해.”라고 답한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묻는다.

“근데 아빠, 이거… 슬픈 노래야?”

감성 + 사고력 + 분석력이 발동한 초등 1학년 질문이었다.

“그렇게 느꼈어?” 했더니

“아니, 난 이 노래 들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이 가사가 참 좋아.”

내 마음도 말랑말랄해져서는 답했다.

“그래, 너도 아빠한테 빛나는 사람이야. 앞으로도 더 빛나길 바래.”

나는 이 노래를 듣고 중1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그땐 꽤 반짝였다. 아니 반짝이는 별이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전교회장도 하고, 반장도 했었으니 내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았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와 반장 후보에 올랐을 때 “싫어요” 하고 말했다. 그 당시 내 마음 한켠에는 엄마가 학교에 자주 오는 게 싫었다. 내가 아닌, 엄마를 위한 역할 같았달까.

그리고 그날 담임선생님 전화를 먼저 받았던 엄마는 나를 혼냈다.

‘민주적 자기표현’의 대가였다.


그 이후로 점점,

나는 빛나는 별이 희미해지며 내 인생을 벌레와 더 가깝게 느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자기애는 사라지고 넥스트 가사처럼 세상이 불편하고, 부모는 작아 보이고, 나는 어정쩡한 존재 같았다.

사춘기였다.

심리학자 에릭슨에 따르면 정체감 vs. 역할혼란의 시기.

“나는 누굴까?”

“이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일까, 시키는데로 하면 될까?”

난 그 시기를 잘 버텼고, 사람들과 연결되고, 나를 알아가며 또 다른 나로 태어났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나는 더 이상 별은 아니지만 반딧불 정도는 된다.

크진 않지만, 내 주변을 살짝 밝힐 수 있는 정도.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 삼남매는 나보단 더 빛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 안의 별빛을 의심하지 않고, 혹시 누가 ‘벌레 같아’라고 말해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존감이 높은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사람.

자기만의 리듬으로, 자기만의 불빛으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나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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