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아이가 멀리 간다.
다온이가 다니는 줄넘기 학원에 승급 제도는 단순하다.
정해진 동작과 횟수를 모두 성공해야 합격.
세 번까지는 실수가 허용되지만, 네 번째부터는 탈락.
대신,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성공하면 바로 다음 단계 심사를 볼 수 있음.
얼마 전 다온이는 5급 심사에 도전했다. 긴장된 표정으로 줄을 잡더니, 놀랍게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5급을 통과했다. 덤으로 4급 심사 자격까지 얻은 셈이다. 그래서 도전했고 4급을 땄다.
그런데 1호가 한 말이 의외였다.
“아빠, 그냥 다음에 다시 4급 심사 본다고 말했어. 차근차근하고 싶어. 급수보다 실력이 더 중요해.”
같이 시험 본 언니는 6급에서 한 번에 4급까지 올라갔다며 자랑했지만, 다온이는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보너스보다 과정을 선택한 것이다. 순간 나는 ‘과정보다 결과가 우선시 되는 세상에서, 다온이는 다른 선택을 했고 우리 부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하교 시간이 지났는데도 다온이가 15분이나 늦게 나왔다. 이유를 묻자 대답이 걸작이었다.
“선생님이 받아쓰기 연습을 하고 가라고 했는데, 다른 애들은 종 치자마자 나가버렸어. 나는 끝까지 다 하고 싶었어.”
줄넘기에서 보너스를 내려놓은 다온이, 교실에서는 받아쓰기를 붙잡고 아무도 확인하지 않는 과제를 끝까지 하는 다온이. 빠름이 능력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시대에, 다온이는 두 선택 모두 느리지만 미래 역량을 키우고 미래를 준비하는 결정을 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힘을 내적동기라 부른다.
공부든 운동이든 동기는 크게 두 가지다. 동기는 행동을 만드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외적동기: 점수, 보상, 경쟁심처럼 바깥에서 오는 자극.
내적동기: 배우는 과정 그 자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의미.
고전 이론이든 최신 이론이든 결론은 같다. 오래가는 건 내적동기다.
외적 보상만으로 공부하면 불꽃은 화려하지만 금세 꺼진다. 하지만 내적동기가 있으면 불꽃은 작아도 오래, 꾸준히 타오른다. 자기 결정성이론에서 외적동기가 전혀 쓸모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외적 자극이 내면화되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으로 바뀔 때 힘을 발휘한다. 결국 끝까지 버티게 만드는 건 내적동기라는 의미다.
한국 아이들은 왜 지치기 쉬울까
한국 학생들은 세계적으로도 성취도가 높은 편이다. 물론 학습동기도 높은 편이다. 그런데 연구를 보면, 한국 아이들은 경쟁·외적 동기는 높지만 내적동기는 상대적으로 낮다.
OECD 성인역량 조사(PIAAC)를 보면 그 결과가 더 분명하다. 우리나라 20대 청년들은 문해력, 수리력 등에서 OECD 상위권이지만, 40~50대가 되면 역량이 OECD 성인평균 역량보다 낮아진다. 세대 간 격차도 OECD 평균보다 훨씬 크다. 어릴 땐 외적 자극으로 잘 달리지만, 중·장년에 들어서면 내적 엔진이 약해 힘이 떨어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국은 “빠른 스타트”는 좋은데 “마라톤 완주”에는 약하다.
다온이는 승급보다 과정을 택했고, 종이 울려도 받아쓰기를 끝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느려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더 빠른 성장 방식을 고른 셈이다.
줄넘기 심사장에서 다온이는 급수보다 실력을 중요시했다. 지금보다 미래를 준비하는 결정을 한 셈이다.
빠르게 오르는 아이보다, 오래가는 아이가 결국 더 멀리 간다는 믿음이 다온이에게 신념으로 굳게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
다온이를 보면서 실력보다 급수를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며 살았던 나를 발견했다. 그런 나는 40대에 들어서면서 밑천이 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다온이가 선택한 것 처럼 오래가고 더 멀리 가는 삶을 나도 함께 실천해야겠다. 그런 내 모습을 다온이가 보고 배우고 또 다온이의 모습을 내가 보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고 싶다.
이 글을 보는 부모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시죠.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다 아실 겁니다. 실천이 어렵죠.
외적 보상으로만 움직이는 공부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과정을 즐기고, 끝까지 해내는 힘은 아이를 평생 배우게 만듭니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빠른 성적이 아니라 오래 배우는 법을 옆에서 응원해 주는 것 아닐까요? 다 같이 노력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