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그대의 삶
얼마 전 동료와 차를 타고 가다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가끔은… 죽으면 좀 평화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쳐.”
순간, 그가 나를 쳐다보며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해?”
나는 웃으며 대화를 넘겼지만 속으론 이렇게 중얼거렸다.
‘부정이 아니라 신호인데…’
올해 쉰 살.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 둘째 셋째는 다섯 살 쌍둥이. 우리 집은 매일이 오일 장터다. 아침엔 아침밥, 가방 챙기기, 옷타령, 화장실 전쟁, 저녁엔 숙제 전쟁, 밤에는 동화책 리그.
그 사이 사이에 우리 부부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고, 꾸준히 일해서 삼남매를 키워야 하고, 스무 살 이후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가도록 힘을 길러줘야 한다는 압박이 내 머리 위에서 메트로놈처럼 ‘똑, 똑’ 울린다.
그러다 보면 문득, 마음속 무의식 중에 이런 문장이 스친다.
“지금 이 모든 걸 그만두면 차라리 평화롭지 않을까?"
한국 사회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예민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40대의 주요 사망원인 1위가 처음으로 자살로 집계됐다. 암보다 위에 있다. 생애 중반, 가장 책임이 크고 가장 벅찬 시기. 그 무게에 많은 사람들이 주저앉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OECD 자살률 1위 국가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사회적으로도 일종의 트라우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오히려 그것은 삶의 중요한 신호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피햐려는 문화가 오히려 자살 1위 국가가 된 이유이지 않을까? 죽음의 인식은 회피가 아니라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스위치다.
스티브 잡스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건 큰 선택을 도와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말했다. 죽음을 의식하면 체면이나 두려움 같은 잡음이 사라지고, 진짜 중요한 것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요즘 아침마다 체감한다.
삼남매와의 에피소드: 요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
작년 말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첫째 다온이가 이런 질문을 했다.
“아빠, 사람은 왜 죽어?”
세상 가장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나는 당황했지만, 이렇게 답했다.
“죽음이 있으니까, 오늘 하루가 더 소중해지는 거야. 그리고 외할머니는 여기 다온이 마음 여기 아빠 마음에 영원히 함께 있어. 의미 있게 잘 살면 죽어도 영원히 소중한 사람 마음에서 같이 사는 거야.”
그 말을 하고 난 뒤, 내가 더 놀랐다. 아이에게 한 말이 사실은 나에게 필요한 대답이었다. 나에게 20년 넘게 장모님과 함께한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길 가다가 꿈 속에서도 문득 문득 장모님이 떠오른다. 내 마음이 이렇게 아린데. 아내 마음을 어떨까? 가늠을 하기 어렵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감정과 지금 감정은 다르다. 그 만큼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주 떠오르는 요즘이다.
아이들도 이미 삶과 죽음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배우고 있다. 그런 계기를 놓치지 말고 함께 해야 겠다.
죽음 인식이 알려주는 것들
첫째, 덜 중요한 것을 덜어낸다.
회의 하나, 메시지 한 줄, 남에게 잘 보이려는 작은 몸짓. 다 줄여주는 통찰을 준다.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잡음을 걸러주는 필터다.
둘째, 나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아이 성적보다 아이와의 관계, 회사 성과보다 내 몸의 회복, 사람들의 인정보다 나만의 의미. 죽음을 의식하면 우선순위가 더 분명해진다.
셋째, 삶을 더 적극적으로 만든다.
숙제 검사에 잔소리를 붙이는 대신, 아이와 동네 산책을 나가서 오늘 궁금했던 질문을 나눈다. 그게 더 오래 남는다. 인생이란 결국 어떤 하루를 반복해 살고 싶은가의 문제니까.
부모가 자신을 비우고 대하면, 아이는 그 빈칸을 채우려 애쓴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다 바쳤다”라는 말은 사랑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에게는 짐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커서 내가 죽음에 가까이 다가 섰을 때 이렇게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빠, 당신의 삶은 결국… 나 때문이었나요?”
나는 희생이 아니라 함께 성장의 이야기를 물려주고 싶다. 아이도 배우고, 나도 배우는 집. 아이가 꿈을 꾸듯, 아빠도 여전히 미래를 탐색하는 집. 그런 집이 되면 좋겠다.
웰다잉은 죽음을 잘 준비하자는 운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 더 잘 살자는 제안이다. 죽음을 떠올려야 지금의 시간이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생각하는 습관’을 내 루틴으로 삼으려 한다.
아침 거울 앞에서 묻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이 계획을 그대로 할까?”
일주일에 한 번, 90분은 오롯이 나의 인생 제2막(글쓰기·공부·실험)에 투자한다.
분기에 한 번은, 세 문장을 적는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무엇으로 일하고 싶은가, 누구와 함께하고 싶은가.”
이 작은 루틴이야말로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의 태도’다.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산다. 희생하는 등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삶을 사는 등을 보여주고 싶다. 죽음이 나에게 전혀 부정적이지 않다.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유한한 내 삶에서 지금 여기 몰입하는 사람이고 싶다.
동료에게 못다 한 말
그날 동료가 내 말을 부정적으로 잘랐을 때, 나는 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건, 오히려 더 열심히 살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빠가 너희에게 주고 싶은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삶을 살던 아빠야.”
아이들은 그 선물을 보고 배울 것이다.
타인의 기대 대신, 자기 의미로 하루를 채우는 법을.